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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토란 Dec 16. 2020

어른과 으른 1편

이왕이면 철 든 어른으로 

  나는 책을 읽을 때 여러 권을 조금씩 나누어 그 때의 기분에 따라 집어 들어 읽는 편이다. 한권을 정독해서 완결하고 다음 권으로 넘어가지 않고, 보통 네다섯 권의 책을 돌아가며 읽고 또 다른 책을 고른다. 마치 음식점에 가면 정사각형의 티슈가 서로 반씩 맞물리면서 포개어 있는 것처럼 내가 읽는 책은 쏙쏙 뽑아 쓰는 티슈처럼 자꾸 나온다. 그래서 장편 소설을 띄엄띄엄 읽다보면 내용이 툭툭 끊어져 전개가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면에서 단편집은 나의 독서 패턴에 잘 들어맞는다.  

   

  최근에 김영하 작가의 단편집 모음 <오직 두 사람> 이란 책을 읽었다. 김영하 작가는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처음 보았고, 그의 대표작 <살인자의 기억법>은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재미도 있고 인기가 있었다. 그는 외모에서 풍기는 유순한 이미지나 어투와 다르게 그의 글에는 특유의 그 허를 찌르는 묘사와 내용 전개의 반전 매력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연 ‘오직 두 사람’.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이다. “보고 싶은 언니에게…….” 로 시작하는 편지글 형식을 띠고 있고 그 언니에게 현주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낸다. 전체적인 정서는 쓸쓸하고 허탈함이었다. 글의 앞부분에 나오는 문장 ‘아무와도 대답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 그 고독이 어떤 스토리를 가지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녀의 인생에서 늘 함께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주인공이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어쩌다 가족 여행이 아닌 아버지와 둘만 가게 된 유럽여행을 계기로 다른 가족들과는 별개의 특별한 사이가 된다. 한 달 정도 이어진 여행에서 묘사된 아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어른스럽지 않은 어른의 행동을 보여 준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 때부터 매사에 아빠의 눈치를 보게 되고 살피게 되었다. 전적으로 아빠의 소유물인 된 양 그가 바라는 대로 지극히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주인공의 부모가 이혼하고 아빠와 둘이 살게 된 그 이후에는 주인공의 생활은 온전히 아빠에게 맞춰서 돌아간다. 심지어 연애도 쉽지 않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 둘만의 언어를 사용하던 그녀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희귀 언어의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언어에 적응하고 다시금 삶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소설은 마무리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에 여러 번 신경이 거슬렸다. 이는 주인공의 아버지 뿐 아니라 그녀의 직장인 학원에서 만난 동료선생의 아버지 또한 그랬다. 그녀 또한 자신의 각별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갑상선암에 걸리자 아버지는 “그거 착한 암이다.”, “별거 아니다”라는 말만 하고 슬슬 상활을 피한다. 늘 자신을 지지해 주고 곁에서 보필해주던 딸의 상항이 나빠져 이제 본인이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이기적인 아버지는 그 현실조차 외면해 버린다. 자신이 불편한 것은 조금도 싫은 것이다. 암 진단을 받은 딸에게 그렇게 위로 같지도 않은, 잘 모르는 사람도 영혼이 담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상투적인 말만 하는 부분에서 ‘아, 어쩜 저런 미성숙한 어른이 있을까? 저런 철 들지 않은 인생을 사는 어른들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고 그저 순수하게 행복할까?’란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동료와 같은 상황에 놓여 보아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위로를 받아본 나이기 때문에 그 동료가 느끼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느껴질 감정, 그것은 아마 배신감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른답지 못한 어른. 평가 항목을 조목조목 내 세워 각각의 점수를 내고 평균값을 환산 해 어느 정도 이상이면 어른스럽다는 기준이 딱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른스럽지 못한 기준은 있다. 생각이나 행동이 미성숙한 부류. 하지만 그 건 그 사람의 기질적인 성향이나 오래 도록 익숙해져서 마치 그 사람을 대변하는 성격이 되어버린 것. 그러니까 절대 바뀌지 않을 것들도 많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을 내 세울 수는 없다. 그저 그도 그인 것이고, 그들만의 색이 다른 것뿐이다.     


  그렇게 색이 다른 사람은 주위에 꼭 한두 명씩 있다. 그런 사람들과는 되도록 피하고 싶고 공적으로 대할 때조차 너무 조심스러웠다. 또 그런 사람들은 취향, 즉 사람을 대하는 호불호가 어찌나 단호한지 자신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바로 잘 못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의 말을 쏟아낸다. 더 최악은 그런 성격에 뒷담화를 즐기는 부류.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불편해 하면서도 그 사람의 그 불호 부류에 들면 피곤한 상황이 생기니 그저 억지로 맞춰주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왜 저렇게 살까 싶다가도 또 저리 순전히 본인 위주로 살면 스트레스 없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난 불편하다. 평범과 비범의 기준조차도 모호하고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지만 난 그런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들을 적당히 받아 주는 것조차 이제는 꺼려지게 되었다. 사회 초년생만 해도 박쥐 우화에 나오는 박쥐처럼 쥐가 되었다가 새가 되었다가 어떤 누구와도 두루뭉술 잘 맞춰주고 불편하고 싫어도 겉으로는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안하고 싶어졌다. 그런 억지스런 행동이 의미가 없었다.     

  난, 이왕이면 철 든 어른이 되고 싶다. 철 들지 않은 인생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겠지만, 그건 사람이 가지는 순수함의 문제지 순진함의 문제는 아니다. 철 든 인생을 살면서 순수한 즐거움을 맘껏 누리는 것.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불편해 하지 않고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주는 것. 단순함과 유쾌함을 장착한 진짜 어른. 소설의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언니 같은 편안한 사람.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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