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수건

by 선영

햇볕 좋은 날, 왁자지껄한 티브이 소음을 배경 삼아 쌓인 빨래를 개키고 있었다. 머리를 텅 비우고 단순 노동을 하고 있자니, 무심코 수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 OOO 근로자의 날 기념’


풋. 어이없는 실소가 나왔다. 엄마처럼 수건을 삶지 않으니 누레지는 수건이 싫어 부러 색이 화려한 수건만 골라온 터였다. 그런데 하필 아빠 회사에서 나눠준 근로자의 날 기념 수건이라니, 어이가 없네.


부모님과는 다른 시대를 살아온 데다가 아빠는 나와는 경력 차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니 가끔 견해의 차이로 인한 언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가끔 아빠를 보면 복잡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기지도 못하는 술에 찌들어 밤새도록 토악질을 하고 하루가 다르게 푸석해지는 얼굴과 하얗게 세는 머리칼을 보며 메이는 목을 억지로 참아야 하는 날도 있었다. 물론 그 속이야 본인인 아빠, 아니 해장국 끓이고 턱 밑까지 약을 밀어 넣어주는 엄마만이야 하겠냐 만은 속상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회사일로 무척이나 힘들어했던 아빠를 알기에 근로자의 날 기념 수건을 받아 들고 와서 딸내미 집에 걸어 놓은 상황이 무척이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뽀송하게 마른 수건을 개키고 있자니 인생의 연대기가 따로 없다. 각종 기념일의 총집합이다. 아빠 국민학교 동문회 수건을 개키고 있자니 명절에 ‘기어이’ 동문회를 참석하겠다고 나서는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빠 회사 창립기념일 기념 수건을 보면서 아빠 회사 옥상에서 병아리를 뒤쫓던 기억이 난다. 아빠 사무실에 나만큼 자주 놀러 가던 사람이 또 있을까? 아빠방이 따로 생겼다고 구경까지 갔더랬지. 할머니의 고희연 수건에서는 보고 싶은 얼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기억나지 않는 머나먼 친척의 돌잔치 수건은 어쩌다 받아온 것일까. 나의 첫 직장이었던 은행 체육대회 수건을 잡아든 순간 바로 내던져 버렸다. 징글징글하군. 아빠 대학원 총동문회 수건을 보니 함께 수업을 듣는 부자(父子) 동기가 부럽다 말하던 아빠가 떠오른다. 몇 장 되지도 않는 수건에 부모님의 꼬꼬마 시절부터 지금 나의 현재 상황까지 모두 담겨있다. 연대순으로 수건을 나열하면 알록달록 막대그래프 마냥 보기 좋겠다 하는 실없는 상상에 킥킥 웃음이 났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취직을 해서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던 아빠의 인생이 수건 몇 장으로 집약되어 나에게 다가온다. 아빠가 살아온 인생의 무게가 나의 심장을 묵직하게 눌러 온다. 알록달록한 수건들의 색깔만큼 아빠의 인생도 알록달록 했을까? 무지개 빛깔만큼은 반짝거리지 않을 수도 있고, 계속 빨고 삶아서 조금은 색이 바랬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한테 만큼은 가장 부드럽고 아름다운 색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앞으로 채워질 수건은 또 어떤 색일까? 아빠가 새로 만드는 수건은 무지개 빛깔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햇빛 듬뿍 받아 보송보송하고 포근한 향까지 날 수 있는 수건을 만드는 일은 아마도 나의 몫이겠지. 앞으로 우리 집을 가득 채울 알록달록한 수건들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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