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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 May 06. 2019

공부와 삶은 일치해야 할까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타자에 대한 윤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철학자 레비나스의 책을 오래 읽고 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부담은 쌓이는 것 같다. 이 철학자의 사유를 읽으며 이해하며, 많은 부분 공감하기도 설득당하기도 하기에, 그 정도로 가까워졌다면 어느 정도는, 그 사유가 그저 머릿속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도 삶으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런데 그렇다고 그 철학자가 구성한 사유 체계의 요소들 하나하나에 모두 다 공감하는 것은 아니기에, 선택적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 사유를 오래 읽었다 해서 굳이 내 삶이 그와 비슷하게 닮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 철학자가 자신의 사유를 펼쳐내기 위해 끌어오고 재해석하며 제기하는, 그 모든 생각들 개념들 사태들에 대하여, 전반적으로는 그 뜻에 찬동하면서도 그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있고, 아마도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러한 찬동과 거부 사이에서 자기 나름의 생각을 또 정립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으니까. 그렇다면 결국에는 그 철학에 영향을 받은 내 사유가 다시 남을 뿐이고, 그 영향이란 닮아지는 걸 수도 틀어지는 걸 수도, 혹은 이도 저도 아닌 영 다른 방향이 될 수도 있을 테다.


그러한 면에서 한 사람이, 자신이 믿는 종교를 대하는 태도와 자신이 공부하는 철학을 대하는 태도에는, 사뭇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이 유명한 성경 구절은, 믿음에 관하여 정말로 탁월하게 정의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말에 따르자면 믿음은, 그 대상에 대하여 이미 확신하면서도 다시 확인해나가는 작업이다. 그러하기에 믿음은 그 대상이라던가 그 대상이 뜻하는 가치나 삶에 대하여, 이미 어떠한 긍정을, 일종의 수용을 깔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하여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새롭게 열리는 의미가 있다 해도, 그 의미에 먼저 나를 맞춰가 보려 애쓰지, 그 의미를 내 기준에 맞춰 의도적으로 재단하거나 절충하려 들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철학의 작업은 그 기초에서부터 나의 주관을 바탕으로 하는 것 아닐까. 어렴풋하든 긴가민가하든 일단은 내 생각이나 내 느낌이 있어서, 그러한 나의 것과 내 주위 것들을 비교하며 판단하며, 나의 사유를 조금 더 구체화하고 정립해나가는 것 아닐까. 거창하게 나의 사유라 할 만큼의 뚜렷한 체계는 아직 없다 해도, 최소한 내 마음에 듦과 들지 않음, 끌림과 끌리지 않음, 그래서 피와 아를 식별할 수는 있지 않을까. 살아가며 마주하게 될 그 무수한 사태들, 개념들, 사유들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서의 내 생각이,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거나 어떠한 일관성을 갖춘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고 그래서 나 스스로 끊임없이 반성하며 노력해야 할 작업일 테지만, 그 마주한 하나하나에 대하여 드러나는 나의 즉각적 반응은, 기존의 내 생각과 대응하며 어느 정도는 분명히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니까. 그러하기에 공부하는 대상과 나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앞선 긍정과 수용보다는 경계와 탐색이 먼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닮아가기에는 오히려 더 어렵지 않을까.


다만 오래 읽고 또 오래 알아서, 그 철학자의 사유가 이미 내 생각 속 익숙히 녹아든 상태라면, 어느 정도는 일치에 대한 부담도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이미 내가 그 철학자의 사유를 오랜 기간 공부해왔기 때문이라기보다, 이제는 영향받아 어떤 식으로든 변화한 바로 내 사유와 내 삶 사이 관계에서 불거지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역시 한낱 인간으로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가 다 일관적일 수는 없을 테니 그 한계를 인정하며, 다소 미흡하지만 장차 노력해가야 할 부분으로 남겨놓을 수도 있을 테고…. 어떤 지향점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공부의 내용을 내 사유 속으로 깊숙이 받아들였다면. 하지만 그 역시 그 철학자가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사유를 정립하며 바라봤던 그 구체적 지향점과는 이미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바라보며 걷는다 해도, 들판의 좁았던 그 흙길은 어느새 다지고 정비된 넓은 도로가 되고, 다시 또 아스팔트로 포장된 차로 옆 인도가 되어버렸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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