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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 May 19. 2019

영화 안경(2007)

이 영화를 처음 봤던 건 한창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때. 우연히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봤던 건지, 아니면 그때 열심히 참석하던 영화 모임에서 다 같이 봤던 건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하여튼 이 영화를 참 많이도 봤다. 정말로 좋아하는 영화이고 그만큼 여러 번 봤다. 이 영화가 전해 주는 그 평온한 감성을 느끼고 싶을 때마다, 이러한 삶도 있다고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마다, 혹은 내 옆에 소중한 사람이 함께할 때.


그 당시 이 영화는 나에게 정말로 감격스러웠고, 그렇게 깊이 감화된 만큼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확실히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진정된 생각들, 그렇게 뿌연 먼지들 가라앉아서 조금은 더 맑게 보이고, 그래서 정말로 내가 이제까지 바라왔고 앞으로도 희망하는 삶의 모습들은 이런 거구나, 그제야 내 속에서 발견하며 확인하고 받아들이게 된 생각들이 무척이나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전해 주는 여러 삶의 의미들에 대하여 전반적으로는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번에 마침 연인과 나란히 앉아 다시 보던 중에는, 예전에 무심코 넘어갔던 장면들에서 또 다른 의문들이 스며 올라오는 걸 느꼈다.


햇볕이 따스하고 잔잔한 파도와 한적한 해변이 평온한 어느 섬의 정갈한 민박집 하마다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다. 큰 여행 가방을 끌고서 약간은 경계 어린 얼굴과 함께. 이 손님 타에코는 이 섬과 민박집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잘 적응하지 못한다. 하지만 충분히 잘 어울릴만한 재능은 있는 사람이었다. 잔잔한 일상을 담담히 살아가며, 소소한 계기들에 의미를 찾고 즐거워하며, 하루의 많은 시간을 사색으로 채우면서도 늘어지거나 나태해지지는 않으며, 하나하나 정성껏 여유롭게 해나가는 삶.


타에코는 휴대폰이 통하지 않는 곳을 찾아 이 섬까지 오게 된 것이었고, “지구 같은 거 사라져 버리면 좋을 텐데”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렇게만 살아오다 이제는 지쳐버린 것, 더는 안 되겠으니 달아나 보자, 뛰쳐나올 수 있었던 마음이야말로, 이 섬의 삶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게 하는 재능일까. 하지만 처음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왠지 낯설고 거북하게도 느껴지는 하마다를 떠나, 새로운 숙소 마린팔레스로 옮겨 보려는 마음을 먹기도 했었고. 이 영화의 이러한 초반부를 다시 보며 떠오른 의문은, 왜 이 하마다의 사람들이 아직은 기존의 삶의 습관대로 질문을 던지고 반응하는 타에코에게, 약간은 불친절한 듯 도리어 이상한 사람을 본다는 듯, 약간은 무표정하게 그래서 약간은 기분 나빠질 수 있게도 응시하는 걸까였다.


이 유사한 장면들이 이 영화 초반부의 유머를 만들고, 그 시선 덕분에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도 하지만, 그러한 영화적 장치로서가 아니라면 조금은 의아해지는 구석도 있다. 이러한 대안적 삶에 대한 요청이나 바람이 생긴 건, 사실 전혀 그렇게 살 수 없도록 내몰리고 경쟁하게 치열하게 서두르게만 살아가도록 하는 이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적 삶의 대표이자 일종의 영적 존재로까지 느껴지는 사쿠라 씨를 굳이 제외한다면, 다들 그러한 현대 사회를 거쳐온 사람들일 테고, 그래서 초반부 타에코의 어색해하는 반응을 전혀 이해할 수 없지는 않을 테다. 어쩌면 공감할 수도 있었을 테고.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오지는 않았을 테니.


그래서인지 이번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는 그러한 장면들이 조금은 배타적으로도, 재능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이러한 영화적 삶이 가능할 사람, 불가능할 사람을 구분 짓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그래서 타에코가 마린팔레스의 콘셉트,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조금도 쉬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해하며 매 순간을 노동과 공부에 바쳐야 하는 삶의 콘셉트에 화들짝 놀라 빠져나와서는, 인적도 없고 외지고도 머나먼 외로운 길을 마냥 걷다 걷다 지쳐 도저히 걸을 수 없을 때쯤,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데리러 와준 사쿠라상의 뒤편에 앉아 넋을 놓고 돌아가는 장면은, 어쩌면 종교적 귀의, 나쁘게는 사이비에 넘어가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설득하기보다는 그저 불러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들은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득된다기보다, 이렇게 감성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이끌리듯 이해되고 형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 장면의 고즈넉한 풍경들, 울림이 깊은 배경 음악 덕분에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그리고 그 결과나 이끌린 방향이 그리 나쁘다고도 말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그 장면이 마냥 편안할 수만은 없는, 삶의 큰 건너감이 드러나는, 그래서 사실은 위험하기도 중대하기도 한 삶의 한 순간일 수도 있겠다 싶어졌다.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삶의 콘셉트가, 현실에서는 그리 쉽사리 성취될 수 없기에 이상적이라 말할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희망하며 추구해볼 만하기에 이상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하기에 내 삶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만 이 영화의 후반부에 조금씩 섞여 들어오는 일종의 실존주의랄까 싶은 생각들의 부정적 함의는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동의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조금은 다른 방향도 있을 듯싶다.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사상적 원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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