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 훈련을 받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원이 많다 보니, 일과 중 한 훈련과 다음 훈련 사이 느슨한 시간들이 많았고, 대기하면서 가져간 책을 읽으면서, 졸면서 창밖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별다른 긴장도 없이,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며, 조금은 지루하게 조금은 마음 놓고, 다음 일정들을 아무 부담 없이 기다릴 수 있는 이런 순간들, 이런 시간들이 과연 얼마 만이었던가 하는 생각.
군 생활 당시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그렇게도 많이 들었다. 상급부대 어느 지휘관이 이 금언에 무척이나 큰 감명을 받아서, 예하부대 여기저기에 써 붙이라고도 했던 것 같고, 그런 유행이라 나도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자는 교육자료를 만들기도 했었던 것 같고. 이 금언 자체가 낯선 군 생활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꽤 도움이 되었다고도 하였으니 말이다. ‘국방부 시계는 그래도 흐른다’라는 이 유명하고도 유용한 말과 그 뜻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음에도, 훨씬 더 고상해 보이니 권장하기에도 좋고.
아마도 이 금언이 어떠한 위로를 줄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당면한 이 상황이 일시적이라는 것, 끝이 있다는 것, 그래서 지금 당장은 끝이 안 보이는 듯 힘들어도 그 끝을 향해 한순간 한순간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 시간이 얼마나 지루하든 고생스럽든, 그 시간을 그저 버텨내기만 한다면, 그 지나간 시간 그리고 그 버텨낸 과정 자체가 이미 어떠한 결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 이미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 버스 안에 앉아 있어서, 그 여정이 얼마나 지겹든 그 좌석이 얼마나 불편하든, 여하튼 그 목적지를 향해가는 궤도 속에서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시간을 마냥 흘려보낼 수만은 없는 심정의 상황들은 뭘까. 꿋꿋이 버티고만 있었더니, 그 자리를 지킨다며 아등바등 애써왔는데, 알고 보니 악화되고만 있었으며 곪아가기만 하고 있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아직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 애써 외면하다, 더는 혼자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짓눌릴 때. 뭔가 대처하긴 해야 할 텐데, 막연하면서도 확연한 불안감. 이런저런 방법들을 고민하며 헤매기는 하지만, 도무지 나아지진 않고, 도리어 헛발질처럼 허우적거리고만 있을 때. 그곳으로 가야겠다 마음먹고 찾아갔지만, 문이 닫혀 있어서, 자리가 없어서, 기대만큼 어울리지 않아서,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때부터는 정처 없이 겉돌며 배회하며 조금씩 조금씩 지쳐버리는 것. 시간은 흘러가고, 해내야 한다, 마음먹었던 일은 마음만큼 잘 진행되지 않아서, 흘러가는 시간만큼 그 세월만큼 더 무겁게 압박해 들어올 때. 짓물러 곪아 터지는 수밖에.
지금 내가 살아내는 이 순간은 묵묵히 지나가며 그래도 뚜벅뚜벅 진행되는 시간일까, 쉴 새 없이 누적되는 소리 없는 상처들에 어느새 곪아가는 시간일까. 아마도 흘러가고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애틋함이 더 번지는 걸로 봐선, 곪아가는 쪽이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 하지만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폭넓게 내다볼 때, 곪아가는 시간 역시 시간으로서 흘러가야만 하는 시간이긴 할 테니, 그 또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일부일 뿐이지 않을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금언은 굳이 힘들고 괴로운 일들에만 적용되지 않으며, 마땅히 즐겁고 자랑스러운 일들에도 적용되는 금언이다. 그래서 침착하고 겸손할 것을, 그저 삶의 그러함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을 알려 주는 말일 테다. 그러하기에 나의 지나가는 시간 혹은 나의 곪아가는 시간도, 결국에는 지나가는 시간으로서 살아내야 하지 않겠나. 시간이 흘러가고 삶이 지속하는 한, 곪았다가도 터지고 결국에는 아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