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논리에서 드러나는
존재 너머의 구조들에 의해 중단된 논리는 철학적 명제들에 변증적 구조를 부여하지 못한다.
체계를 중단시키는 것은 범주에 대한 부정 이상의 것인 최상급이다.
마치 논리적 질서와 그것에 짝하는 존재가
자신들을 초과하는 최상급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은 사태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1장 3절의 본인 각주 중에서
이 부분을 세미나 시간에 선생님들과 함께 읽으면서, 이 ‘최상급’이란 표현이 정말로 재미있고 또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논리가, 질서가, 또는 존재가 그 내부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며 물고 물려 그 극단에 치달을 때, 그 상황을 내부적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 자멸할 것만 같을 때, 그 내부의 것들과는 전혀 동등할 수도 없고 너무나도 현격한 위상을 가진 무언가가 비로소 드러나는데, 그 난데없이 저 높이 저 깊이 있는 것으로 도약해 있는 그 무언가, 그것을 굳이 언급하고자 한다면 그 표현은 ‘최상급’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과정이나 그러데이션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최상급. 그저 가장 위에 있는 것.
이 대목과 유사한 맥락으로 역시나 떠오르는 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이다. 인간사의 갈등이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때, 그래서 그 상황을 도리어 악화시키고만 있을 때, 그리하여 그 갈등 속 인물들이 더욱더 처참하고 파괴적인 결심이나 행동들로 내몰릴 때, 비로소 그 차원 외부의 신적 존재가 개입하여 상황을 정리하고 단숨에 종결짓는 것. 어쩌면 개연성을 파괴하고 상황의 복잡함을 어이없이 끊어내는 무리수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또 어쩌면 그리도 복잡한 삶들이 그렇게 얽혀 들어가면서도 그나마 이 정도라도 삶이 유지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필요 혹은 요청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비슷한 역할을 근현대 소설 속에서는 혹은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이 맡아왔다고 들은 적 있다. 그 누군가가 어떠한 갈등의 중심에서 그 갈등을 심각하게 추동한 인물이든, 그저 그 갈등에 불행히도 휩쓸린 인물이든, 죽어 마땅한 악인이든 무고한 희생양이든, 그 누군가의 죽음이 진정한 죽음 본연의 면모로 강림한다면, 그때는 그 상황이 순식간에 소강되며 어느 쪽으로든 급속히 결정될 수밖에 없다고. 죽음이란, 진실로 마주했을 때 그 실체를 전혀 알 수 없는 대상, 하지만 그 깊이랄까 무거움이랄까 그 앞에서는 그 무엇도 가능하지 않고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함으로써는 절실히 와 닿는, 그야말로 다른 차원의 것일 테다. 그러하기에 그 앞에서는 허다한 이름들, 무수한 이해관계들이 퇴색하며, 무력화되고, 오로지 당면한 선택만이 남아 결정을 앞당기는 것이다.
이렇듯 내부적으로는 결코 도출될 수 없는 대상, 제아무리 첨예한 대립과 변증적 구조들로 넘본다 해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대상, 그 너머에, 까마득히 멀리, 깊이, 높이, 범접할 수 없음으로만 나타날 수 있는 대상, 하지만 우리 삶에 이미 현현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어느새 근접해 있는 대상, 그리하여 도무지 풀릴 수 없을 것처럼 엉켜 있던 우리의 상황을 구원하거나 종결짓는 대상, 우리의 내부적 불가능을 가능성으로 바꿔놓는 대상. 이러한 대상의 정체를 앞서 언급하였듯 신이라고도 혹은 죽음이라고, 아니면 다른 어떠한 형이상학적 대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대목과 유사한 문장들에서, 레비나스가 결국에는 염두에 두고 있을 이 최상급의 정체는 바로 ‘타자’일 것이다.
내 앞의 타자, 내가 마주하고 있는 나 아닌 다른 자에게, 앞서 풀어놓은 뜻에서의 최상급이란 의미를 결부시킨다는 것. 나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으로서, 내 자아가 바라보는 관점으로서만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타자는 그저 내가 중심인 내 세계 속에서 단지 구성요소라던가, 환경적 요인이라던가, 일말의 변수로서밖에 취급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앞의 그 누구이든 사실 그 사람에 대하여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그 사람을 내 뜻대로 소유하거나 움직일 수 있을지를 엄밀히 고려해 본다면, 우리는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하여 붙잡을 수 있는 명확한 단 하나의 진실은, 단지 그 사람이 내 앞에 있다는 것밖에 없다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레비나스의 타자는 현현할 것이다. 그리고 내 앞의 그 한 사람은 나에게 그러한 타자로서, 얼굴로서, 최상급으로서 임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타자 앞에 내부적인 갈등과 이해관계들, 그 모든 복잡함은 역시나 페이드아웃, 사그라질 뿐이다.
내가 무엇보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사유에서 여전히 또 새롭게 놀라는 지점은, 그러한 삶의 최상급으로서의 타자가 사실은 너무도 가까이, 그리고 너무도 일상적으로 내 곁에, 매 순간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