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 Nov 11. 2018

엄마는 독립군의 딸

어렸을 때 막연하게 엄마로부터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말을 듣긴 했었다.

주로 외갓집이 충청도에서 큰부자였었다는 회상으로 끝나는, 예전에는 아주 아주 잘살았었다는 후일담으로 끝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가고 우린 이렇게 가난하게 사느냐고 제법  논리적인 사고를 하게된 어린  오빠가 물으면

외할아버지가 모든 재산을 가지고 만주로 가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외할아버지가 젊은시절, 그러니까 아직 20대인 어린 아빠는 전재산을 정리해 부인과 고만고만한 어린 딸들을 이끌고 만주로 가신 것이다.

어린시절을 만주에서 보낸 적이 있는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만주의 화적 떼에게 돈을 뺏기고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유년의 기억이  남아 있다.  외할머니도 잇따라 돌아가시자 엄마를 비롯한 독립군의 자녀들은 고아가 되었다. 엄마의 기억 퍼즐조각을 맞춰보면 화적떼는 곧 독립군이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였던 그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돌아가신게 아니라 화적떼 때문이라고 주입시킨 것.

부모를 잃은 엄마와 이모들은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어린 이모들은 외갓집에서 데려가고 엄마는 서울에 있는 큰집으로 들어가게된다.
큰집에서는 아직 엄마의 할머니가 살아계셨기에 울타리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이집에서 애기씨로 불리웠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보면 김태리는 애기씨로 불리우며 귀한 대접을 받던데

우리엄마는 그렇지 못했나보다.
엄마는 다 늙어서까지 그 친척들로 부터 영원한 애기씨로 불리웠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끈 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큰집 역시 부자이긴 했지만 대동아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제의 수탈이 심해졌다고 한다.
엄마의 아버지뻘인 사촌오빠는 아무런 일도 하지않는 룸펜으로, 시골에 있던 그 많은 땅을 조금씩 팔아 생활하면서 부모잃은 사촌 동생을 공부 시키기는커녕 소학교를 졸업하자 집에서 아기들이나 보게 했다.

집안에는 첩의 자식들까지 열명의 아이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일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도 아기보는 보모 손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늘 그게 궁금했다.

외삼촌이나 이모들이 엄마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그렇지만 대학까지 다닌 다른 이모들과 달리 왜 엄마만 학교를 가지 않았을까 하고.

좀더 자라서야 그분들이 사촌이모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엄마의 고된 어린시절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여간 부모 잃은 엄마의 자매들은 이렇게 친척집에서 고생하며 각자 자라게된다. 독립군의 자녀들이다.


엄마와 이모들의 혼인은 원래 쟁쟁한 양반 집안의 딸들이었다는 프리미엄이 남아있어서인지 그렇게 터무니없이 낮춰가지는 않았나보다. 이모는 엄마와는 다르게 지방의 좋은 집안 분과 결혼하면서 평생을 안락하게 살고계시다.

반면 엄마는 서울에서 좀 살만한 집안이지만 바람둥이 남편을 만나 평생 고생하셨다.


얼마전에 이종사촌으로부터 외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행적을 찾는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충청도에서 만석꾼의 아들이었던 외할아버지가 전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활동하다가 돌아가셨다는 증거 말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더니 엄마의 형제들은 물론, 우리 모두는 풍족하지 못했다. 오빠를 비롯해 이종사촌들도 고생하면서  어렵게 공부했다.

그동안 정부로부터 어떤 혜택도 없었다. 아예 독립군 후손을 찾을 생각도 하지않았던 것이다.

정부가 이제서야 독립군 유족을 찾는 사업을 한다고 해서 신청을 했다고 한다.
독립군의 큰 딸인 우리엄마는 이미 작년에 돌아가셨고, 이모님도 건강이 좋지않아 서두르는중이라는데 그말을 들으니 은근 부아가 났다.

이제와서 밝혀진들 돌아가신 엄마에게 무슨 위로가 될까? 독립군 딸인 엄마의 일생은 고단했을 뿐이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치곤 전혀 기죽지 않고 늘 당당했으며 자존심도 강했다.
이모 또한 마찬가지인 걸 보면 기본적으로 독립군 자식으로서의 긍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특히 돼먹지않게 거들먹거리는 졸부나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 앞에서는 전혀 기죽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공손하게 예의를 다해 존경을 표했던 기억이 있다.

독립군 후손찾는 사업이 형식적으로 끝나지 않고 제대로 진척되어 좋은 소식이 온다면 아직 살아계신 이모님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역시 그 큰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엄마는 이제 이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꼭 전해 드리고 싶다.
- 엄마는 자랑스런 독립군의 딸이예요.




매거진의 이전글 부음(訃音)의 기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