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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Feb 27. 2021

65세 여자 사람 이야기

강명희 소설 '65세'가 주는 힘

10넘게 다니고 있는 동네 병원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조금 높게 나왔다며 고지혈증 약을 처방해줬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위험 수치가 얼마인지 다 알아볼 수 있는 반의사가 된 환자답게 이 정도면 약 먹지 않아도 되지 않겠냐고 투덜거렸더니 나이가 나이니만큼 먹어두는 게 좋단다.

역시 인터넷으로 약을 오래 복용하는 게 좋지 않다는 정보를 수없이 보아온지라 부작용 걱정을 하며 물었더니

"이 약의 부작용이라면 너무 오래 산다는 거죠"

평소에도 유머감각이 뛰어나 동네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의사는 내가 파~하고 웃자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요즘 사람들 진짜 너무 오래 살아요. 옛날에는 환갑잔치라는 것도 했잖아요. 고혈압약, 고지혈약, 당뇨약이 없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오래 살지 못할 거예요"

환자가 복용을 게을리 할까봐 애둘러 재치있게 말해주는 친절한 주치의 아니더라도 이제는 어딜 가나 너무 오래 살아갈 사람으로 눈치 받는 천덕꾸러기  노인세대가 되었다.


강명희 소설가의 세 번째 소설집이 나왔다.

제목은 '65세'

제목이 비장하다. 청춘의 20세도 아니고,

서른 살 이야기도 아니고,

불혹이라는 자랑 아닌 자랑도 아니고,

어느덧 지천명이라는 엄살도 지나 60세도 아닌 딱 65세!로 박았다. 

작가 또한 에필로그에서 이 소설집을 단산斷産하는 심정으로 내보냈다고 했으니 '65세'가 주는 비장함을 알만하다.  작가는 아직은 누구 아내이자 누구의 어머니, 게다가 누구 할머니라는 짐까지 끌어안았으면서도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거침없이 풀어놓는다. 

이전에 발표한 '히말라야 바위치'나 '서른 개의 노을' 처럼 강명희 소설의 매력은 건강함이다. 거칠면서도 알맹이는 충실한 열매를 따서 투박한 옹기에 담아놓은 것 같은 소설은 한번 펼치면 마지막 페이지가 끝날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간결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문장으로 단숨에 읽을 수 있어 복잡한 현대 생활에 찌든 독자들에게 시원한 청량감을 준다. 그러면서도 쉽게 생각하고 넘겨버릴 수 없는 내용들 때문인지 마니아 독자도 꽤 있는 편이다.


아홉 편의 단편 중에서 '첫추위' 20대 마지막을 보내는 청춘의 주인공을 제외하면 대부분 베이비부머 세대의 이야기다.

 '65세'의 '나'는 65세 생일을 맞이하며 자기 손으로 미역국을 끓인다. 손녀를 낳으며 여왕으로 등극한 며느리가 아들과 함께 와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이다. 요즘 며느라기라는 웹툰 드라마 같은 데서 당하는 며느리 시집살이와는 먼 나라 이야기다.

'긴 하루'처럼 하필 아들의 결혼식날 노모가 운명하는 바람에 노모를 영안실에 안치한 채 식을 진행하는 광경은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의술이 워낙 좋은 요즘 노부모가 언제 돌아가실지 알 수 없는 채로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다고 해서 자식의 혼사를 마냥 미룰 수만 없기 때문이다. 황망한 가운데  한술 더 떠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숨겨진 친딸이라는 여자가 나타나 장례식장을 뒤집는다.

'그녀가 세상을 건너는 법'처럼 여자보다 남자는 어리숙하다. 평생 동안 직장 다니는 일 밖에 못해 세상 물정 모르는 베이비부머 시대의 남자는 젊은 날 다른 여자에게 가서 살다가 다 늙어서야 본처였던 여자에게 돌아와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된다. 백종원처럼 음식을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새우젓 두부찌개가 그리워 여자에게 매달리는 남자들 꼴이라니. 하긴 찌개를 잘 끓이는 여자가 침대에서의 매너도 좋다더라는 남성 위주의 멘트가 유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목련꽃 필 무렵'의 정식은 은퇴 후 퇴직금을 굴리려다 사기를 당하고 살인까지 하게 된다. 복역을 마치고 병까지 든 남자를 거두어주는 여자는 없다. 여자들 계산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아직 아기인 애자를 이복형제들이 무덤 위에서 공 굴리듯 굴려 내리며 놀이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그 충격으로 열이 나서 죽은 동생을 대변하지 못한  '아픈 손가락'의 '그'는 결혼해서 아내를 때리는 폭력 남편이 된다. 도무지 희망이라곤 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도 작가 특유의 건강함을 발휘해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강명희 소설의 특징이다.

누군가 이 소설집을 읽고는 '82년생 김지영'의 엄마 이야기라고 비유했는데 그 말에 공감이 갔다. 근원을 알 수 없어 방황하는 82년생 김지영들에게 특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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