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 동네 같은 사피에서 음디나(L-Imdina)+라바트(Rabat)로 이동했다. 아마도 몰타에서 발레타 외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 음디나일 것이다. 중세까지 몰타의 수도였고, 지역 자체가 중세 때 모습 그대로 박제된 느낌이다.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음디나로 들어가는 메인 문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정말 '유명 관광지'에 왔구나를 실감했다. 일단 사람이 아주 아주 많다. 기분 좋은 활기참이나 분주한 수준을 넘어서, 내 기준에선 뭔가 기빨리고 정신없는 광경이다. 하도 관광객들 없는 지역에서 왔더니 더 그랬을 수도 있다. 관광버스가 계속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버스 한 대당 수십 명의 관광객들이 쏟아져 내린다. 이곳 숙소 체크인까지 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어간 카페는 굉장히 불친절하고,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고 시끄럽다. 난 정말 관광지 체질이 아님을 절감하면서(나도 관광객이면서 ㅎㅎ) 급 피로감이 느껴졌다.
잠깐 음디나 안에 들어갔는데, 사람에 가려서 건물이 안 보인다. 멋있는 스팟에는 사진 찍으려는 인파로 가득하다. 건물이고 뭐고 볼 수가 없어서 일단 나와서 쉬기로 했다.(이전 숙소에서 여기까지 살짝 무리해서 걸어왔기 때문에 쉼이 필요하기도 했다).
다행히 숙소가 정말 너무너무 훌륭해서 체크인하고선 급 피로해진 기분이 누그러졌다. 1박에 10만 원 정도 하는, 몰타에서 잡은 가장 비싼 숙소였는데(이곳은 관광지라서 이보다 싸게 잡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다 갖춰진+발코니가 있는 게스트하우스 꼭대기 층이었다. 이틀전에 급하게 잡은 숙소인데 너무나 완벽했다. 심지어 욕조가 있었다! 영국 와서 가장 그리운게 반신욕이었는데 그걸 몰타 와서하게 됐다.
숙소 발코니에서 음디나를 볼 수 있었다
숙소에서 잠시 쉬고 음디나 대신 라바트에 있는 세인트폴 카타콤으로 향했다. (라바트와 음디나는 붙어 있는 마을이다. 중세 때 음디나는 귀족들의 도시, 라바트는 평민 도시였다고 한다.'도시'라고 부르지만 음디나는 3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다).
세인트폴 카타콤은 몰타에 있는 카타콤 중 가장 큰 카타콤이다(3-8세기의 것). 세인트폴(성경의 그 바울)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바울과 역사적으로 직접 관련은 없다. 대신 세인트폴 카타콤 옆에 세인트폴 교구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가 바울이(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이 로마에 가던 중 배가 난파돼 멜리데에 표류했다는 그 멜리데가 이 음디나+라바트 지역) 몰타에 왔을 때 머문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17세기경 지은 것이고, 이 카타콤은 이 가톨릭 교회 바로 옆에 있어서 같은 이름을 갖게 됐다. 생애 첫 카타콤 구경이었고, 매우 볼만했다.
세인트폴 카타콤
음디나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 향했다. 숙소가 음디나 도보 5분 거리여서, 동네 베이커리에서 아침식사용으로 파스티치를 하나 사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때 먹은 첫 파스티치는 정말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갓 구운 이 몰타 페스츄리(리코타 치즈, 콩이 들어간 두 가지 종류가 일반적이고 치킨 들어간 것도 가끔 판다. 난 치즈 들어간 것부터 먹어봤다)를 여기서 처음 먹어 보고 문자 그대로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게다가 가격이 50센트다!). 그 옆집에서 60센트짜리 아메리카노를 사서 같이 들고 가면서 먹는데, 이 1유로짜리 아침식사의 만족감이 여기서 먹은 어떤 식사보다도 컸다. 영국으로 돌아온 지금도 이 파스티치가 생각난다. 이거 먹으러 다시 몰타 갈 수 있겠다 싶다 ㅠㅠ
아.. 정말 못 잊을 맛..
정말 친절했던 사장님, 여기는 어떻게든 또 가고 싶다
그렇게 해가 막 뜬 음디나로 들어갔다. 어제랑은 또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보통 몰타에 패키지로 여행 오는 사람들은 발레타에 베이스를 두고 음디나는 1일 투어로 버스를 타고 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음디나의 아침과 밤은 고요하다.
음디나 안에 사는 주민들만 좀 계시고 외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전세 낸 것처럼 천천히 구경했다. 이 마을 자체가 통째로 중세여서 시간 여행 온 기분이다. 음디나에서 몰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스폿이 있는데-어제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던-여기서 테이크아웃해 간 커피랑 파이를 먹으면서 아침 몰타 전경을 봤다. 평화로움 그 자체다. 혹시 몰타 여행을 할 계획이 있고 음디나를 갈 예정이라면 필히 여기서 1박을 하고 아침에 구경하는 걸 강력 추천한다. 낮과는 완전히 다르다.
마침 돌아다니다가 이곳 주민 아주머니를 만나서 사진 찍어 달라는 부탁을 하다가 대화를 길게 하게 됐는데, 아주머니가 교황이 내일 여기에 방문한다고 알려주신다(난 전혀 몰랐다 ㅎㅎ) 아주머니는 교황이 몇 년 전에 이곳에서 몇 개월 동안 체류한 적도 있다면서 자랑스럽게 말씀하신다. 어쩐지 동네 곳곳에 포스터가 붙어 있는데 몰타어로 돼 있어서 무슨 말인 지 몰랐는데 그런 뜻이었구나 ㅎㅎ 이날 보안요원들이 유독 많았던 것도 그제야 이해가 됐다.
숙박비가 비싸서 이 지역엔 1박밖에 못했지만, 여긴 몰타의 다른 지역과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다. 음디나야 그 자체로 워낙 유명한 곳이고, 나는 라바트의 분위기도 좋았다. 수백 년은 됐음직한 건물들에 지금도 운영하는 미용실, 베이커리, 동네 슈퍼가 있다. 유적지이면서 그냥 지금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유적지는 흔히 보존돼야 할, 거리감 느껴지는 대상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여기는 그냥 지금도 사람들이 사는 공간의 일부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유산인 음디나도 손도 못 댈 것 같은 유적지의 느낌이 아니라 그냥 쭉 누군가 살고 있는 동네 같은 느낌에 더 가깝다. 정말 많은 차들이 주차돼 있는 걸 보면 느낄 수 있다ㅎㅎ. 그리고 아침에 가보면 야채랑 과일 파는 트럭 근처에 동네 주민들이 몰려 있다. 유명 관광지 같은 위압감이나 인위적인 모습 대신, 그냥 있는 그대로 사람 사는 곳 같다. 그래서 더 시간 여행하는 느낌이 든다.
참치가 들어간 2.5유로짜리 몰타 샌드위치 프티라. 저 반쪽이 스벅 샌드위치 하나만하다. 가성비 엄청 좋은 한끼 식사. 물론 맛있다.
이 프티라를 사 먹은 동네 식당. 안에 동네분들로 꽉 차있다.
로컬 맛집 찾기는 이 지역에서도 성공적이었다. 이 지역에도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파인 다이닝들이 많지만, 잘 찾아보면 주민들이 찾아가는 로컬 식당들이 있다. 동네 아저씨, 할아버지들로 만석인 파르페 전문점이라고 붙여진 가게가 있길래 여기서 2.5유로짜리 참치 프티라를 사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동네 베이커리에는 파스티치를 사러 들어갔는데, 사장님(으로 보이시는 분)이 여기는 안 판다고 저기서 판다고 문 앞까지 나와서 손으로 가르치며 알려주신다. 남의 가게까지 이렇게 친절하게 안내해주시는 ㅎㅎ 아침에 파스티치 사 먹은 그 집이다. 이 파이 마스터라는 로컬 베이커리도 정말 강추다. 새벽 6시30분에 문을 여는데, 7시쯤 도착했더니 주민들이 몰려 있다. 일단 맛있고, 사장님이 정말 친절하다. 이건 뭐에요? 저건 뭐 들었어요? 물어보는 데 세상 친절하게 알려주신다 ㅎㅎ 첫날 방문했던 그 놀라울 정도로 불친절했던 카페 때문에 이곳의 인상이 안 좋아질 뻔했는데, 떠날 때는 좋은 인상이 훨씬 압도하는 곳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