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음악 여행기(5): Liszt 의 흔적을 찾아서
리스트(1811-1886)라는 음악가는 알지만, 이 사람을 '헝가리'라는 나라와 연결지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비로소 헝가리를 리스트와 연결지을 수 있었다. 19세기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국경을 넘어서 활동했던 것처럼 리스트도 한창 때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활동을 하고 50세를 넘긴 후기에야 부다페스트로 돌아왔다고 한다. 헝가리의 또 다른 대표 음악가 벨라 바르톡(1881-1945)이 인생의 대부분을 헝가리에서 보낸 것과는 대조된다. 아마도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 천재'로서 많은 곳에 불려다닐 수밖에 없었고, 그 자신이 여행을 좋아한 까닭에 코스모폴리탄적 삶을 산 게 아닌가 싶다.
말년에 리스트가 헝가리의 정신을 음악에 담아내고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 교육에도 열심이었다고는 하나, 부다페스트의 관문 공항에 이 음악가의 이름을 뒤늦게 붙인 것 이외에 생각보다 그의 유산을 찾아볼 수 있는 공간이 많지는 않았다. 여행 계획에 두 곳을 넣어두었는데, 리스트 음악원과 리스트 박물관이다.
먼저 리스트 음악원. 단일 건물로 이루어진 음악 교육 대학으로, 1875년 리스트가 음악 교육을 위해 설립을 주도했다고 한다. 헝가리를 넘어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그만큼 다수의 유명 음악가를 배출했으나, 바르톡과 바르톡을 사사한 유명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1912-1997)가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리스트 음악원 출신이라고 한다. 게오르그 솔티는 최다 그래미상 수상자(무려 31회라고!)로도 특히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대학교를 생각하고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로울 줄 알았으나, 단일 건물로 이루어져 출입 통제가 매우 수월한 구조다. 학생이거나, 혹은 음악원 내 공연장에 온 것이 아니라면 출입 제한을 한다는 것을 용감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 뒤 "Are you here for a concert?"라고 묻는 관리자 때문에 알게 되었다. 아들에게 음악원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으나, 그저 건물 주변을 뱅글뱅글 도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아들이 "엄마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왔네?"라고 하기에 꿀밤을 세게 한 대 때려줄 뻔했다.
음악원 정문 위에는 리스트의 조각상이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고, 정문을 바라보고 왼편에는 게오르그 솔티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제작된 동상이 위트 있게 서있다. 나치의 집권과 2차 세계대전 발발 전 솔티가 헝가리에 거주하던 시절, 이 음악원에서 걸어서 7분쯤 걸리는 국립오페라극장에 지휘 알바를 하러 다니기도 했다고 하니 그가 걸어다니며 보았을법한 주변 건물들을 눈에 담으며 오페라극장으로 향한다.
월요일, 부다페스트를 떠나는 아침. 리스트 박물관을 가지 않고 '부다페스트여 안녕!'을 외칠 수 없기에, 아침 일찍 부지런을 떨어 리스트 박물관으로 향했다. 짐을 다 싸두고도 시간이 남아 걸어서 박물관에 갔는데, 오픈 10분 전이다. 머리를 빡빡 민, 큰 체격의, 무뚝뚝한 얼굴을 한 경비 아저씨가 "It's not yet 10. You have to wait."이라고 말한다. 말은 박물관이지만, 실제 살던 곳을 박물관으로 만든 것이라 입구 공간도 좁아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위축된다. 고분고분한 얼굴로 "기꺼이 기다릴께요"라고 했다.
1개층 3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박물관. 오디오 가이드를 쓰지 않았더라면 5분이면 쓱 둘러볼 정도의 규모다. 다행히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리스트의 가족사진, 연주 팜플렛, 여행가방, 작곡 책상, 기도 책상, 여러대의 피아노, 초상화와 흉상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작은 공예품과 수의까지... 이들에 얽힌 스토리가 그의 음악과 함께 플레이된다. 박물관 구성이 말년에 헝가리에서 지내던 시절이 주가 되었기에, 이미 '성직자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리스트의 흔적들이 다분히 정갈하고 담백하게 나열되어 있는 듯 하다.
1시간을 꽉 채워서 둘러보았지만 어쩐히 허전하다. 리스트의 삶 전체를 그려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들이 충분히 대우 받는 환경에서 전시된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예를 들면,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리스트의 대표작 <사랑의 꿈 Liebestraum>을 작곡할 당시 열애 중이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의 관계, 이에 앞서 9년간 연애를 하며 세 명의 자식을 낳은 마리 다구 부인과의 시기, 여성 팬들이 실신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피아니스트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때의 리스트의 삶은 이 곳 박물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낭만주의 음악의 큰 줄기를 탄생시킨 음악가의 삶을 조명하는 박물관으로서는 다분히 아쉬움이 큰 공간이랄 수밖에 없다.
여러 아쉬운 마음에도 불구, 이제 나와 아들은 리스트 이름을 들으면 부다페스트를 떠올리고 부다페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면 리스트를 자동 연상하게 될 터다. 햇살 좋은 겨울 아침에 분주하게 출근하는 헝가리인들 사이로 박물관을 향해 걷던 기억이 가끔씩 떠올라 미소지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꿀밤을 때리고 싶었던 음악원 앞에서의 감정조차도 미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