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DJ 이야기
“어떻게 이런 카페를 차릴 생각을 하셨어요?”
손님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다. 누구에게는 젊은 시절 음악다방에 대한 추억을 소환하는 곳이고, 또 누구에게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특별한 테마 카페를 어떤 동기로 차리게 됐는지 손님들은 궁금해한다. L은 DJ를 했던 경험과 좋아하는 음악을 사람들과 같이 듣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긴 하지만 DJ 경험이 동기가 됐다는 대답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거니와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말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DJ는 어떤 계기로 하시게 된 건가요?”
손님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 편이다. 무엇인가 하나라도 더 알아내기 위한 사람처럼 DJ를 하게 된 동기에 관해 묻는다. 종종 듣는 물음인데도 L은 주춤거린다. 감정의 과장이나 미문의 부끄러움을 아는 나이가 됐는데도 그 겨울을 회상할라치면 여지없이 절제의 힘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꽃다운 시절이 있기 마련인데 L은 열예닐곱 살 무렵이 그랬다. 언제까지라도 곁에 있어 주리라던 그 애로 인해 심장은 강렬하게 뛰었고 세상은 유쾌했다. 정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행복한 상상의 세계가 L을 가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입은 내상도,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던 염세주의적 비관도 그 애 덕분에 달랠 수 있었다. 그때껏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고 그 시절을 회고할 때 두 사람의 관계를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그 시절의 그 애를 L은 첫사랑이라 여겼다.
웬만한 또래 아이들은 두 사람을 공식 커플로 인정했고 부러워했다. 시골이라 소문이 나면 곤경에 처할 것이었는데 고맙게도 아이들은 두 사람의 비밀을 지켜줬다. 그래서였는지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의 은밀한 데이트는 점점 대담해져 갔다. 나란히 붙어 있는 남고와 여고에 들어간 두 사람은 날마다 등하교를 같이했다. 시험 기간에는 시내에 있는 독서실에서 공부했는데 남자반과 여자반의 구분이 확실한 까닭에 화장실을 가거나 밖에서가 아니면 볼 수 없어 애를 태웠다. 기어이 일을 낸 것은 그 애였다. 새벽에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그 애가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남자 반에 넘어왔다가 주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한 번의 옐로카드도 없이 독서실에서 퇴장당했다. 한 번은 밤에 공부하다가 배가 고파 급우네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고 독서실로 돌아오던 중에 통행금지에 걸려 파출소에서 몇 시간을 잡혀 있었는데도 함께 있어 좋았다.
L은 야간자율학습 때 몇몇 아이들과 함께 그 애가 다니는 학교의 매점에 침투한 적도 있었다. 교사에게 걸린 L과 친구들은 금남의 구역을 침범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어쩌다 만날 수 없는 날, L은 집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쌍안경으로 그 애의 집을 바라보곤 했다. 들판을 가로지른 산자락 아래 그 애가 사는 집이 있었는데 쌍안경으로 보면 사람의 움직임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어느 순간에 담벼락 위로 사람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는데 그 애가 쌍안경으로 L의 집을 향해 보고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은 손수건을 흔들고, 어떤 날은 그 애가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가로질러 오기도 했다. L이 서낭당 고개로 올라가면 자전거로 달려온 그 애를 볼 수 있었는데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나 바로 가야 해”라고 말하고는 그 길로 자전거를 돌려 왔던 길을 쌩하고 달려가는 날도 있었다. 어떤 날엔 심장이 쿵쿵거렸고 어떤 날엔 행복했고 또 어떤 날엔 눈물이 솟구쳤던 그 시절과 두 사람을 첫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열일곱 살의 겨울, 어느 눈보라 치던 깊은 밤에 그 사랑은 정지됐다. L의 집에서부터 들판을 가로지른 곳에 누워있던 산자락 아래, 그 애의 집 앞에서였다. 마을로 가는 막차에서도,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가는 동안에도 그 애는 말이 없었다. L보다 몇 걸음 앞서서 걷던 그 애가 그녀의 집 가까이에서 걸음을 멈췄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 애였다.
“우리, 그만해.”
그 애의 마른 목소리가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L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뭐라고?”
“헤어지자고.”
망설임이 없었다. 격정도, 감정의 동요도 없는 것 같았다. 떨림도 물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늘했다. 헤어질 뻔했던 적은 이전에도 몇 번 있었는데 매번 L이 먼저 이별을 꺼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애는 울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그 애는 매번 앞으로 잘할 테니 헤어지지 말자고 애원했다. 그랬던 그 애가 먼저 헤어지자고 할 줄은 몰랐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L의 심장엔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 바람이 지나가면서 휘파람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L은 매달렸다. 그 아이를 잃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 애는 흔들리지 않았다. L이 매달릴수록 오히려 그 애는 이별의 결심을 굳히는 것 같았다. L의 애원과 그 애의 뿌리침이 계속됐다.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 애를 그대로 놓아줄 수 없었다. 그 애가 한발 물러섰다. 집에 들어가 어른들에게 귀가를 알린 뒤 몰래 다시 나오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제야 L은 그 애를 놔줬다.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갈기갈기 종이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칼바람과 거친 눈발을 그대로 맞은 채 몇 시간을 기다렸다. 바람에 대문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심장은 요동쳤고 이내 절망하고 마는 순간을 반복했다. 하늘을 휘감아 도는 바람의 방향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서 눈보라가 밀려왔다. 눈바람은 L을 할퀴고 지나서는 어둠에 잡아먹힌 용화산 자락에 부딪히며 음울한 울음소리를 냈다. 바람 때문인지, L의 인기척 때문인지 그녀의 집 마당에서는 큰 개가 컹컹 짖어댔다. 발부터 얼기 시작한 몸은 어느 순간부터 비현실적인 세계에 들어간 느낌처럼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최면과도 같은 상황에서 L을 깨운 것은 대문 소리였다. 끼이익. 단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분명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였다. 다시 닫히는 소리. L이 서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이였다. L에게 가까울수록 그 애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달려들어 L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치며 독설을 쏟아냈다.
“미쳤구나! 미쳤어. 미쳤어.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멍충이, 미련 곰탱이. 내가,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너 때문에 …….”
그 애가 울고 있었다. L도 울었다. 대패로 살얼음을 갈아도 그보다는 날카롭지 않을 것 같던 칼바람 속에서 참아내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살을 에는 것 같은 맹렬한 추위보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L을 무너뜨렸다.
“너, 나 믿어?”
그 애가 감정을 가다듬고 그렇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L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믿어”라고 답했다.
“그럼 가. 가서 공부 열심히 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
L은 그 애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공부 열심히 하는 거 알잖아.”
L은 항의하듯 말했다.
“더 열심히 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
“대체 무슨 소리야. 공부도 너랑 같이해서 더 잘하는 거 몰라?”
L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애와 L이 연애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학업성적을 염려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염려는 괜한 것이 됐다. L과 그 애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좋은 성적이 두 사람의 노력을 증명해 줬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 애가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L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너 혼자 해.”
“너는?”
“난, 대학 안 가.”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로 가자고 약속했잖아.”
“이제부터는 나랑 상관없이 너 혼자 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 부탁이야.”
부탁이라니. 헤어지자고 하는 마당에 공부 열심히 하라는 부탁을 하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더는 그녀에게 매달릴 수 없을 것 같다는 거였다. L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던 그 애가, 어떤 일이 있어도 평생을 같이하리라던 그 애가 이별을 고하고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L은 입술을 깨물며 돌아섰다. 몸속에서조차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너는, DJ를 하면 잘할 거야!”
그 애의 외침이 바람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L은 주춤거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디제이? 디제이가 뭐지?’ 중요한 순간인 느낌은 있는데 정작 L은 DJ가 무엇인지 몰랐다. ‘디자이너를 말하는 건가? 내가 디자이너를 하면 잘할 거라고?’ 그 상황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모지리가 된 L에게 그 애가 다시 말했다.
“내 생각 그만하고 신문방송학과 가서 DJ로 성공해. 내가 너 만나러 갈 거야. 내 말 잊지 마!”
휘몰아치는 눈바람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내지르던 산자락의 비명과 함께 그 애의 외침에 가까운 소리가 구멍 난 심장에 박혀왔다. L은 그 애가 있는 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 애는 등을 돌린 채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대문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앞산의 왕소나무는 왕왕 울어댔고 L도 이불속에서 밤새 울었다. 거대한 비극 속에서 눈물과 콧물이 범벅될 만큼 울면서도 L은 자꾸만 DJ가 대체 무엇인지, 혹시 그 애가 디자이너를 디제이라고 잘못 말한 것은 아닌지 따위의 생각을 하고 또 했다.
“고등학교 때 어떤 애가 저한테 DJ를 하면 잘할 거라고 했어요. 그게 제 인생을 바꿔놨죠.”
L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손님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카페 스피커에서는 둘다섯이 부른 <먼 훗날>이 흘러나왔다. 그 애가 L에게 자주 불러주던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