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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리 Jun 07. 2022

금복처럼 사랑하리랏다

사랑에 대한 방어기제가 센 여자의 다짐


‘고래’라는 책을 꺼내 드는 순간부터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시간이 채 얼마 걸리지 않았다.(독서모임 우독클에서 함께 읽었던 책 중 가장 최단시간 안에 읽은 책이었다.) 시대적 흐름에 적절히 버무려낸 금복과 춘희의 인생 일대기는 미친 흡인력으로 잠드는 순간까지도 다 넘기지 못했던 책장이 떠올라 다시 책을 꺼내 들게 만들었다.     


 책장을 넘기는 중간중간에 책의 제목인 ‘고래’가 출연한다. 이 책에서 ‘고래’는 금복이 평생 쫓지만 가질 수 없는 욕망을 뜻하는 듯했다. 산골마을에서 생선장수를 따라 남쪽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보았던 고래는 산골마을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생명이 주는 원초적 감동을 느끼게 해 주었고, 부두에서 어부들에게 잡혀 고깃덩어리로 해체되어가던 고래를 보았을 땐 본인의 처지인 양 서러워했다. 결국 금복은 덕장, 국밥집, 다방, 벽돌공장을 거쳐 번 돈으로 금복의 욕망의 결정판인 ‘고래’ 모양을 본뜬 극장을 세웠지만, 모두 허망하게 불타버리고 말았다.     

금복은 생각이 깊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에 충실했으며 자신의 직관을 어리석을 만큼 턱없이 신뢰했다. 그녀는 고래의 이미지에 사로잡혔고 커피에 탐닉했으며 스크린 속에 거침없이 빠져들고 사랑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녀에게 ‘적당히’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 고래, 천명관 -


 금복은 본인의 욕망에 충실한 여자였다. 사랑에서 또한 그러했다. 평대마을의 경제, 문화적 주도권을 쥐고 흔들 정도로 여장부다웠지만, 때론 온 맘을 다해 사랑했다. 피 끓는 시절 불꽃처럼 사랑했던 걱정이 사고로 몸이 망가졌을 때 그의 안위를 해결하기 위해 칼자국과의 동침을 마다하지 않았고, 벽돌쟁이文, 목사, 수련 그리고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인부들까지 욕망이 끓어오르는 순간 여과 없이 욕망을 분출시켰고, 그 순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나는 자유와 행복에 집중하는 ‘낙천가’ 에니어그램 7번이다. 하지만 사랑에서만큼은 안전을 추구하는 ‘충성가’ 6번 기질이 다분한 7W6번 여자이다. 그런 나이기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금복이 책장을 넘기는 내내 부러웠다.      


 난 주변 친구들이 말하는 매력적인 나쁜남자 냄새가 다분한 남자들은 철저하게 걸러냈다. 그런 냄새를 풍기는 남자들이 다가올 때면 동물적 감각으로 경계하고, 밀어냈다. 나에겐 이성관만큼은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내가 끌렸던 남자들의 이미지는 순박한 이미지로 나에게 상처 주지 않을 것 같아 보여야 했고, 나보다 더 나를 갈망해야 했으며, 순박해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지적인 분위기를 풍겨 줏대 있어 보여야 했다.      


 원래 나쁜 것은 빨리 배우고, 눈에 먼저 들어온다. 그것은 배움의 법칙이다.


 나의 이런 이성관은 친가 친척들을 통해 자리 잡혔다. 우리 부모님이 결혼식을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와 바람난년을 잡아야 한다며 며느리인 우리 엄마를 굳이 데리고 역전 모텔들을 뒤지고 다녔던 우리 할머니, 술과 노름에 빠져 가족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작은 아버지 때문에 아들 둘을 내팽개치고 도망가버린 둘째 작은엄마, 그럼에도 귀한 손자라고 방 안에 박혀 게임만 하는 게임중독자 친척오빠와 동생을 고슴도치처럼 함함하며 부양하는 남아 선호 사상의 끝판왕 우리 할머니(아마 그들이 손녀였다면 절대로 부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같이 바람을 피우는 셋째 작은아버지와 싸워 명절 때마다 여기저기 파랗게 멍들고 터진 입술로 전을 부치러 왔던 셋째 작은엄마, 그런 동생들을 보며 짠하다며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보증까지 서주고, 신용불량자 동생을 위해 자신 명의로 신용카드도 만들어주는 답답한 우리 아빠.      


 친가 친척들의 이해할 수 없는 다사다난한 사건들을 보며 오는 스트레스를 우리 엄마는 장녀였던 나에게 쏟아냈고, 그걸 들으며 성장한 나는 남성상에 대한 디폴트값이 친가친척들로 세팅되었다. 그렇게 내겐 알 수 없는 남자에 대한 혐오감이 자리 잡았고, 그 감정은 날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싸한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남자, 말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알맹이가 없는 남자, 말에 일관성이 없는 남자, 충동적인 기질이 보이는 남자, 담배, 술, 게임 등에 중독 성향을 보이는 남자, 게으른 남자,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을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는 남자.     


 나는 이성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이런 성향들의 합집합을 제외한 여집합의 남자가 맞는지 항상 검증했다. 이런 검증하는 습관은 나도 모르게 ‘철벽 치는 여자’로 만들었다.

 짐이 무거워 보인다며 도와주겠다는 지나가는 남자에게, 아르바이트 중 관심 있다며 전화번호를 묻는 남자에게, 로맨틱한 전개가 가능했던 여행지에서 추워 보인다며 장갑을 내밀었던 남자에게 ‘NO’를 외쳤다.     



 그렇게 검증을 거쳐 만났던 옛 연인들에 대해 만나는 중에도 계속된 검증으로 행복했던 순간에도 감정에 충실하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진 않았지만 날 좋아해 주고, 똑똑해서 만났던 첫 남자친구 A군은 나에게 더 큰 사랑을 갈구했지만, 내가 감응하지 못해 마침표를 찍었고(A군의 기억 속엔 내가 나쁜년일 듯 하다...),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C군은 충동적인 다혈질적 성향으로 인한 잦은 다툼때문에, 순박한 모습으로 모성애를 불러일으켰지만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던 D군과 니체의 책을 읽고 있는 모습에 반했던 E군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외면하는 모습을 보고 끝내 마침표를 찍었다.     


 검증에 검증을 거쳐 어렵게 시작한 사랑이었지만 결국 완벽한 남자는 없었다. 나와 달리 금복은 그들을 검증하지 않았다. 낯선 타지에서 오갈 곳 없는 자신을 거둬준 생선 장수를, 육체적인 끌림을 느꼈던 8척 장신의 걱정을, 개울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순간의 욕정에 끌렸던 벽돌쟁이 文을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감정을 이입하다니,  두꺼운 책을 빠르게 읽어낸 이유가 금복이의 사랑의 법칙 때문이고, 금복이의 결단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면, 나만의 ‘배움의 법칙’을 명료화해보자.

 검증하는 습관과 방어기제는 접어두고, 금복처럼 사랑하고 싶다. 가끔은 상대보다 상대를 더 갈구하기도 하며 느끼는 대로 온 맘을 다해 내 감정을 표현하자.

 우독클을 통해, 그리고 에니어그램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내 뿌리인 7번답게 사랑할 것이다. 가끔은 금복의 뿌리인 8번 날개를 쓰면서 말이다. 우연처럼 다가온 누군가에게 세 발짝 뒤에서 검증하려고 한다면, 이렇게 속삭이고 싶다.

“어헛, 금복이처럼 사랑하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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