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은 Oct 10. 2021

갔다 온 사람

갔다 온 사람



오은



여름은 낮에, 겨울은 밤에 찾아온다고 너는 말했다 날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반팔은 긴팔이 되었다 팔 대신 밤이 길어졌다 여름낮에 단잠을 자고 겨울밤에 꿀잠을 자는 게 우리의 소원이었다 통일이라는 말, 좀 무섭지 않아? 하나로 합친다는 거잖아 하나와 가까워지게 한다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니 오싹했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잖아 살펴보면 여름날과 겨울날이 다 다른 것처럼 덥고 습하고 푹푹 찌고 춥고 건조하고 등골이 오싹하고…… 우리는 한동안 날씨와 기분,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기분과 관련한 표현을 찾는 데 몰두했다 그때가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여름은 아니었어 겨울도 아니었고 맞는 말이다 우리는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한숨을 주고받다 느닷없이 환절기처럼 헤어졌으니까 아침에 눈떠보니 다른 계절이 와 있었으니까 어땠어? 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름낮처럼 시큼한 냄새가 났다 너는 어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겨울밤처럼 침묵만 깊어갔다 단잠과 꿀잠은 온데간데없었다 여름이 다 갔네 긴팔을 걷으며 네가 말했다 긴팔을 아무리 걷어도 반팔이 되지는 않아 여름에 근접한 네가 말했다 여름은 낮에, 겨울은 밤에 찾아온다고 너는 말했었다 그 뒤로 여름낮과 겨울밤이 유독 길어졌다고도 했다 아침에는 어디론가 갔다가 저녁에는 여기로 온다고 했다 낮은 거기에서 사라지고, 밤은 여기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삶은 한 번에 시작되거나 끝나지 않는 것 같아 한번 해볼까 마음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우리가 지금 여름과 겨울의 사이에 있는 것처럼, 여름낮이 긴 것처럼, 겨울밤은 더 긴 것처럼, 들리지 않는 물음처럼,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간 대답처럼,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반팔을 입고 갔다가 긴팔을 입고 온 사람처럼 여름은 낮에, 겨울은 밤에 찾아온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단잠과 꿀잠은 간절하게 바랄 때에야 겨우 찾아온다 날씨가 좋아도 기분은 좋지 않을 수 있다 건조한 날씨에 축축한 기분으로 걷기도 한다 긴팔을 걷어도 반팔이 될 수는 없지만 반팔에 가까워질 수는 있다 낮이 짧아지면 밤이 길어지듯 여름이 가면 겨울이 올 것이다 그사이에 환절기가 있어서 웅크리고 잠을 잤다 저녁이 되면 다음 계절을 끌고 네가 올 것이다



―『나는 이름이 있었다』(아침달, 2018)에서



작가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