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 FM4U ‘FM 영화음악 정은채입니다’
일을 시작한지 20일 남짓 되었지만, 아직 점심시간 이후 두세시 즈음의 노곤함은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오늘까지 마쳐야 하는 업무는 쌓여있는데, 눈꺼풀은 이미 셔터 내릴 준비를 마쳐버린 상태라고 할까요? 이 시간을 슬기롭게 넘기기 위해 얼마 전부터는 슬며시 한 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제가 좋아하는 영화의 OST를 찾아듣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8-90년대 영화를 즐겨봐서,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모음을 듣고 있는데요. 제가 올타임 넘버원으로 꼽는 영화인 '시네마천국'의 'Cinema Paradiso'나 'Love Theme'이 흘러나오면, 가슴이 저절로 뭉클해지면서 잠이 달아나더라구요! (여러분도 한 번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 링크 첨부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SkyoyyvnAY
영화음악은 그 자체로 생동감이 있는 하나의 특수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역할도 무척이나 다양해서 서사를 진행시키기도 하고, 주제나 분위기를 환기하기도 하죠. 영상이 없는 깜깜이 상태에서 영화음악을 들으면,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머리에 장면이 그려지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음악'을 꼽는 저는, 일부러 영화음악을 찾아듣는 경우가 많은데요. 가끔 밤샘공부를 하던 날이나, 잠이 오지 않던 날에 MBC FM4U에서 이주연 아나운서가 진행하시던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틀어놓곤 했습니다. 감성이 충만해지는 깊은 밤에 음악을 들을 수도 있을뿐더러 평론과 추천까지 해주셔서, 그 날 알게 된 영화들을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에 적어놓고는 했었죠. 하지만 작년 개편 시기 '영화음악'의 진행자가 교체되고, 시간대가 8-9시로 이동하는 바람에 한동안 '영화음악'을 청취하지 못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작년 한 해 밤 늦게까지 외부활동을 하느라 저녁시간에 라디오를 들을 수 없었거든요.
이 글을 준비하면서 지난 일요일(7월 7일) 거의 2년 만에 다시 찾은 '영화음악'은 정은채씨가 진행을 맡고 계셨습니다. 익숙한 톤앤매너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라디오 너머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엿들을 수 있어 홀로 벅차 올랐던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영화의 한 장면을 들려주는 일요일 코너인 '정은채의 시퀀스'도 개인적으로는 너무 취향저격이었습니다. 그 날은 제가 사랑해마지 않는 왕가위 감독의 헐리우드 진출작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명대사가 흘러나왔는데요. 남자친구에게 실연당한 이유를 묻는 엘리자베스와, 이유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도 있다고 위로르 건네는 제레미의 대화였습니다. 그 장면을 들려드릴 수가 없으니 텍스트로라도 소개하고 싶네요…!
Elizabeth: I guess I’m just looking for a reason.
엘리자베스: (내가 헤어지게 된) 이유라도 찾고 싶은 것 같아.
Jeremy: From my observations, sometimes it’s better off not knowing, and other times there’s no reason to be found.
제레미: 내가 보기엔, 어떤 때는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 나을 때도 있어. 그리고 아예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고.
Elizabeth: Everything has a reason.
엘리자베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야.
Jeremy: Hmm. It’s like these pies and cakes. At the end of every night, the cheesecake and the apple pie are always completely gone. The peach cobbler and the chocolate mousse cake are nearly finished... but there’s always a whole blueberry pie left untouched.
제레미: 음… 여기 이 파이와 케잌 같다고 볼 수 있어. 매일 밤 치즈 케잌과 사과 파이는 항상 다 팔리잖아. 복숭아 코블러와 초콜릿 무스케잌도 거의 없어지고. 하지만 블루베리 파이만 거의 팔리지 않아.
Elizabeth: So what’s wrong with the blueberry pie?
엘리자베스: 블루베리 파이는 왜?
Jeremy: There’s nothing wrong with the blueberry pie. Just, people make other choices. You can’t blame the blueberry pie, just... no one wants it.
제레미: 블루베리 파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그냥 사람들이 다른 선택을 할 뿐이지. 블루베리 파이한테 뭐라 할 수는 없어. 그냥 아무도 원하지 않을 뿐이야.
Elizabeth: Wait! I want a piece.
엘리자베스: 그럼 나 한 조각 먹을래!
그동안 저는 영상이 없는 '깜깜이 상태'에서 OST를 듣는 것은 즐겨왔으면서도, 주인공의 대사를 음성으로만 듣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한 시퀀스를 라디오를 들으니, 영상에 집중하느라 곱씹지 못했던 대사 한마디,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가 높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습니다.
수요일에 다시 만난 '영화음악'에서는 이은선 기자님이 특정 주제의 영화 두 편을 추천해주는 '이은선의 필(름) 소 굿' 코너가 진행되었습니다. 개봉예정작 한 편, 이와 비교할 만한 작품 한 편을 선정해 소개해주는 코너인데요. 이번 주에는 ‘수상한 집에 놀러오세요’라는 테마로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스테이시 패슨, 2019)’ 와 ‘크림슨 피크(기예르모 델 토로, 2015)’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제가 ‘크림슨 피크’를 몇 달 전 TV 영화 채널에서 시청했기 때문에, 기자님의 이야기를 조금 더 실감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영화 평론, 추천이 필요할 때 주로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당'이나 유튜브 영화 관련 크리에이터들의 채널 또는 나무위키를 찾아보았는데요. 이은선 기자님이 들려주는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들과 영화 OST와 엮어낸 평론을 들으면 어느 유튜브 채널, 나무위키 문서보다 실속있고 흥미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은채 DJ 역시 배우이자 영화 애호가로서 적절한 리액션을 곁들여주어서, 두 분이 소위 말하는 '티키타카'를 주고받으면 '진짜 그 영화를 보고싶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죠. 이번 회차의 경우에도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라는 영화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잠이 오지 않는 주말 심야영화로 관람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동안 라디오의 매력을 잊고 살았던 제가 ‘영화’라는 주제를 통해 다시 라디오와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출퇴근 시간에 MBC mini의 다시듣기를 통해 ‘영화음악’을 한 회차씩 듣는 재미가 쏠쏠한데요. 아쉽게도 저작권 문제 때문에 (라디오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노래 재생이 안되지만, 음원사이트와 mini를 왔다갔다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영화음악’의 매력에 빠져들어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생방송을 들으면서 함께 호흡하고 싶다는 생각도 점점 커지더라고요.
영화음악’ 생방송은 저녁 8시부터 9시까지이니, 이제 퇴근 후 라디오를 듣고 ‘영화음악’에서 소개한 작품 한 편을 본 후 잠을 청하는 소확행을 즐겨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