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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파규동 Apr 19. 2019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나는 왜 '아메리카노'형 관계를 선호하는가

  작년 가을 집 바로 앞에 새로운 카페가 생겼다. 

  미니멀리즘을 표방했는지 투명한 의자에는 등받이도 없고, 테이블도 손바닥 만한 곳이었다. 학기 중의 나에게 카페는 과제를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곳은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계절 학기에 학회 일까지 겹쳐 힘겨웠던 겨울을 보내고 오랜만에 할 일이 없어지자, 다시 그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불편한 의자와 작은 테이블이 이제는 휴식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무엇엔가 이끌리듯이 점심을 먹고 그곳을 찾았다.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선 그곳 카페 메뉴판에는 다양한 종류의 음료가 차곡차곡 적혀있었다. 나는 새로운 공간에 들어왔으면 새로운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생각에 메뉴판을 스윽 훑어보았다. 라떼… 모카… 티종류에 스무디까지. 아직 마시고 싶은 음료가 나오지 않았는데 메뉴판은 끝나 있었고,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자 종업원과 눈이 마주쳤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결국 습관처럼 내가 항상 마시던 것을 주문해버렸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곰곰히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나에게 ‘커피’ = ‘따뜻한 아메리카노’ 였다. 가끔 시나몬 향이 그리워 카푸치노를 찾을 때 이외에는 다른 시도는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 흔한 ‘아이스’에 마음을 연 것도 지난 여름의 일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렇듯, 나 역시 커피 혼란기를 거쳤다. 갓 스무살이 돼서 카페를 들락거리기 시작했을 때는 카라멜 마끼야또와 카페모카를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커피들은 강렬한 첫맛에 비해 입에 남는 뒷맛이 찝찝했다. 비릿하고 들쩍지근한 느낌은 물을 마셔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내가 아메리카노의 깔끔한 뒷맛에 중독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여기에 어렸을 때 찬 음식을 먹고 장염으로 고생했던 기억들이 겹쳐져, 내 시그니처 음료는 ‘따아’로 굳어졌다.

  

아메리카노式 관계

  이렇게 따아와 함께한 시간도 벌써 5년을 넘어가다 보니, 삶의 곳곳에서 무의식적으로 ‘아메리카노式’을 추구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런 경향은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 


  20대 초반의 나는 그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았고, 그들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랐다. 따라서 나는 자연스레 다른 사람에게 ‘잘 맞춰주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고, 실제로 어딘가에서 내 장점을 물으면 그렇게 대답하기도 했다. 그 때의 나는 누군가에게는 라떼 같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모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생활이 3년, 4년 쌓여가면서 이런저런 집단에 속해보니, 내가 다른 사람을 마냥 받아주면서 행복을 느끼는 유형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분명히 나는 사람들의 특정 행동이 성가시고 거슬리는데, ‘나는 이런 걸 받아주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으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입에 머금을 때 깊은 풍미를 내지만 뒷맛은 깔끔한, 아메리카노와 같은 관계를 선호한다. 아무리 유쾌하고 매력적이더라도, 그 사람의 언행이 계속 머리에 맴돌면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럼 없이 교감하되 개인의 바운더리를 존중해주는 관계. 이것이 20대 중반을 헤쳐나가고 있는 나의 ‘아메리카노’이지 않을까.


집 앞 카페에서는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다.

   테이블이 작아서 노트북을 쓰기도, 책을 읽기도 애매했던 것이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담은 잔이 식어버리고 커피 찌꺼기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아메리카노에 대한 나의 작은 단상도 끝이 났다. 잔을 돌려주러 가면서 애꿎은 메뉴판만 다시 흘깃 보고,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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