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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Jul 30. 2021

여기 주인있는 방입니다만

옛날 옛적에, 대학원 다니던 시절에, 우리과 건물 3층에 복도 끝에 대학원생 연구실이 있었다. 

거기에 있다가 전화가 오면, 모기처럼 목소리를 줄이고 “여보세요, 여기 연구실이야” 라며 받았는데, 

유독 한 친구는 깔깔 웃으며, "연구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라고 했다. "연구실"이 그렇게 웃긴 이름의 방이었음을 그 친구덕분에 처음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그 연구실에서 정작 “연구”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가방 두고 학교 밖으로 나가서 술마시다가 그길로 집에 가버린 사람들의 가방이 홀로 책상을 차지하고 있거나, 공용으로 사용하던 컴퓨터앞에서 줄기차게 스타크래프트와 넷마블 고스톱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있었던 그 책상에 앉아서 연애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정작 연구를 하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사람들은 “연구실”에 나왔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고, 누가 돈주는 사람이 있는것도 아닌데, 내 돈내고 점심 저녁을 사먹으면서 그 자리를 지켰다. 덕분에 연구실은 늘 붐볐다. 


운 나쁜 날에는, 자리가 다 차거나, 각자의 “연구”에 심하게 과열된 사람들의 옆자리밖에 남지 않아, 연구실 문 바로 앞 자리에 앉게 된다. 그 문간 자리를 차지하는 날에는 "연구"는 커녕, 책을 펼치거나 가방을 열 시간조차 없다. 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 나오는 사람들이 오며가며 한마디씩 하는데,


“뭐하냐?” 

“연구하냐?” 

“공부하냐?” 

“이런 날씨에 공부가 돼?”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무슨 공부야” 

“비가 오는데 무슨 공부야” 

대체로 이런 얘기들이다. 


혹은, 

“커피나 한잔 하자” 

“마셨으면 또 한잔해” 

“커피 많이 마셨으면 율무차라도 마셔” 

“나가자, 일반말고 고급커피 사줄게” 

이러기도 한다.


어떤날은 연구실 한켠에 소중히 쌓여있는 컵라면을 두세번, 커피믹스를 대 여섯번 먹거나, 그것도 모자라 건물 밖에 있는 자판기까지 얼떨결에 끌려 나가 또 앉아서 별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떨고, 그길에 학교 밖에 나가서 밥먹고 오고를 반복하기도 했다. 


결국 책 한장 읽지 못하고, 글자하나 쓰지 못하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 연구실 밖을 나간 기억이 허다하다. 지하철타고 한시간 걸려서 학교에 가서 하루종일 인스턴트 커피만 뱃속에 가득채우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길은 또 왜 이렇게 피곤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맨날 나가서 커피한잔 하자던, 밥먹자던, 컵라면 먹자던, 스타크래프트하고 고스톱쳤던 선후배님들이 이제 방송사피디나 교수님이 되어 계시니, 그때 공부를 못한 사람은 아마 나 혼자였던것 같기도 하다. 



서론이 길었다. 


그 말을 하자는게 아니라, 결혼하고 십년이 되어서야 마련한 내 방, 그러니까 내 연구실이, 

우리 가족에게 제일 중요한 간식이 가득 들어차 있는 팬트리와 먹은 간식을 배출해야 하는 화장실 사이 최고의 요충지에 있다보니, 이건 뭐 가족들이 오며 가며 내 방에 들러 툭툭 한마디씩 하거나 간식을 먹고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 불현듯, 마치 그 대학원생 시절 연구실 맨 문간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휴게실도 아니고 라운지도 아니고, 왜 자기들 수업시간이나 미팅시간 전후에 들러서, 나에게 하는 말인지 본인 스스로 하는 말인지도 모를 말들을 한마디씩 하고 가는지. 그리고 왜 꼭 영혼도 없는 대답이라도 듣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아, 애들이 시험을 너무 못봤어”   - "그래?" 

“오늘 비온데?” - ”몰라”

“내일까지 데드라인인데 왜 이렇게 하기 싫냐?” - “그렇구나” 

“나 스낵으로 이거 먹을까 저거 먹을까? - “맘대로”

“둘다 먹어도 돼?” - “안돼”

“오늘 점심은 뭐야?” - “몰라”

“그럼 저녁은 뭐야?” - “안나가!!!!!!” 


심지어 반려견 장군이도 한번씩 내 방에 쓱 들어와서, 한바퀴 돌고 나서 한참 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가 나간다. 인간 셋에 개 한마리까지 시간대를 교차해서 내 방에 들르다 보면, 가끔은 십분에 한번씩 누군가 들어와서 5분정도 지체하, 다음 사람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들어오고 이런 식이다. 


가끔은 시차가 꼬여서 둘 이상 동시에 내 방에 들어오는 적도 있는데, 그럴때는 마치 같은 층 화장실에서 다른 연구실 사람을 만난것 처럼 슬쩍 눈인사들 나누고는 각자 자기할말을 하고 나간다. 한 사람은 "짠걸 먹었나 목이 마르네" 라며 방 왼쪽에 서고, 다른 사람은 "수영장 언제갈래"라며 방 오른쪽으로 걸어간다.  


언젠가는 온 가족이 모두 내 방에 밀고 들어와 발 디딜틈이 없던 적이 있었다. 그럴때는 결국 내가 못참고, "익스큐즈미" 하고 몸을 모로 세워,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 널찍한 거실 소파에 가서 드러 누워버렸다. 


아니, 고작 세평 남짓한,  

이 집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내가 소유한 공간에, 

왜들 이렇게 동네 구멍가게 드나들듯 드나드는지. 

오늘 갑자기 그 연구실 문간 자리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내가 생각났다.

예나 지금이나, 내 주변엔 이런 사람들이 많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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