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엄마는 새벽부터 파란 장화에 낫을 들고 소꼴을 베러 들에 나갔다. 큰오빠 작은 오빠 나 그리고 막내 도시락까지 부뚜막에 줄을 세워 놓고 아침 상을 차려둔 채. 오빠들이 통학선을 놓치지 않으려면 6시에 아침을 먹어야 한다. 엄마는 언제 오려는지 몰라 우리끼리 아침을 먹어야 할 판이다. 오빠들을 깨워 아침을 먹는데 엄마가 소를 앞세워 마당으로 들어선다. 큰 들통에 든 물을 맛있게도 마시는 누렁이를 보며 흐뭇해하는 엄마 .
"많이 먹어라 얼마나 목이 말랐을꼬 "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제일 행복하다는데 엄마는 집에서 키우는 '말못하는 짐승'들이 먼저인 사람같았다. 엄마는 다시 강아지 밥그릇에 멸치 대가리 몇 개를 얹어 밥을 쏟아부어준다.
"엄마는 배 안 고프나 ?"
"사람은 배고프면 '배고프다'말이라도 하지. 말 못 하는 짐승 밥을 먼저 챙겨야 하는 법이다. "
엄마는 항상 이런 식이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새마을 지도자 회의가 있다며 고현 시내에 나간다고 머리를 감는다. 오빠들이 통학선을 타러 골목길을 뛰어내려 가고 나는 동생 머리도 빗겨주고 가방을 메고 나란히 마당에 섰다.
" 학교도 다녀오겠습니다."
" 잘 갔다오너라 "
엄마가 젖은 손으로 막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준다. 늦었다. 빨리 가자 동생 손을 잡아채고 골목을 나섰다.
학교에서 돌아오자 말자 가방을 마루에 던져두고 걸레를 빤다. 반짝반짝 눈이 날 때까지 마루를 닦고 또 닦는다. 멀리서 엄마 목소리가 들린다. 논에 갔다가 동네 가운데 우물가쯤 오셨나 보다. 창일할매 목소리도 들린다. 바지락을 캐서 그날그날 무게를 다는데 뭔가 잘못됐나 보다. 목소리가 커지더니 우리 집 골목까지 이어진다. 이럴 때는 마당도 쓸어두어야 한다. 괜히 불똥이 나한테 튈까 봐 세숫대야에 담긴 물을 마당에 뿌리고 열심히 대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었다. 조금 있으니 창일할매 목소리가 낮아지고 엄마도 웃고 있다. 안심이 된다. 엄마는 뱃일 나간 아버지대신 농사일에 소 두 마리까지 돌보면서 새 마을지도자 부녀회장까지 맡고 계셔서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다. 오늘도 마을 어촌계에서 바지락을 공동 작업했다고 한다. 각자 캔만큼 무게를 달고 21kg씩 한자루로 만들어 중개업자가 오면 실어 보내는데 엄마가 수첩에 그 과정에서 작은 시비가 있었나 보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나서서 중개업자와 마을분들을 서로 중재해 주고 화해를 시킨다. 엄마의 별명이 서 판사가 된 이유다. 이렇게 바쁜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집안일을 알아서 척척하는 것뿐이다.
친구들이 마을 회관 앞에 모여 '깡통 차기'를 해도 정자나무 아래서 '오징어 달구지'를 해도 나는 나갈 수가 없었다. 저녁밥을 해야 했고 마루를 쓸고 닦아야 했다. 엄마는 평소에 낮잠을 몰랐다. 비가 오는 날이면 엄마가 들 일 안 나가니 학교를 마치고 뛰다시피 집으로 왔다. 엄마가 이불홑청을 꿰매고 있으면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일러 바치는 재미가 있었다. "엄마 ,우리 선생님은 가만히 보면 병 주고 약 준다. 어제 체육 시간에 '엎드려뻗쳐'를 시키더니 들고 있던 매로 스무 대씩 때리잖아 .그러더니 미안했던지 안티푸라민을 발라줬다니까"
" 니도 맞았더나"
" 아니. 나랑 재완이는 안 맞았지 "
일주일이 흘렀다. 점심시간에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교무실로 가는 내내 심장이 콩닥콩닥거렸다. 지나가는 다른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는데 목소리가 잠겨 대답도 제대로 못했다. 선생님은 자리에 앉은 채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다가 조용조용 말씀하셨다. 평소에는 목소리가 우렁찬 호랑이선생님인데 누가 들을까 피하는 것처럼 나긋 나긋 말씀하시니 더 걱정이 되었다.
"엄마 다녀가셨다. 음... 선생님이 애들을 때린 건 미안하다. 그런데 사실은 너랑 재완이를 안 때린 건 차별이 아니라 수학 숙제를 너희 둘만 다 해와서 그런 거다. 선생님이 이제부터는 차별 안 할게"
세상에! 오늘 학교에서 가까운 농협에서 회의가 있다더니. 언제 또 학교까지 왔다 가셨을까? 우리 엄마는 서판사가 확실했다. 엄마한테 일렀다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웃으니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엄마의 이런 정확한 성격이 나는 무서웠다. 잘못하면 꼭 지적을 했고 어떤날은 청소를 잘해놓아도 혼나는 일이 있었다. 엄마가 하는 말 중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있다. '무자식이 상팔자다. 이 꼴 저 꼴 안보려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야지' 속상한 일이 있을 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 두 마디는 한 달에 한 번 집에 오는 아버지를 더 기다리게 했고 때로는 원망하게 했다. 사춘기가 되면서 '아버지가 더 훌륭한 직업을 가졌으면 엄마가 고생 안할텐데 엄마는 왜 아버지랑 결혼했을까? '엄마가 저 두 마디를 하는 날이면 꼭 옆에서 엄마 손을 붙들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면 엄마 신발부터 확인하고 학교에 갔다. 장화가 없으면 안심이 되고 장화가 있는데 엄마가 없으면 들에서 엄마가 돌아오는 걸 확인하고서야 학교에 갔다. 그래서 가끔 지각하는 날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큰 일을 앞두거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잠을 자다가도 심장이 저릿해지거나 잠에서 벌떡 깰 때가 있다. 아마도 엄마가 집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던 어린 내가 마음에 남아있어서겠지.
엄마는 아무리 바빠도 학교 학부모 회의가 있거나 상담이 있을 때는 꼭 참석을 하는 편이었다. 내가 중 3이었나 보다.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엄마가 학교가 학교에 왔다. 늘 따라다니던 장화 대신 예쁜 구두를 신고.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엄마가 학교에 오면 친구들한테도 '우리 엄마다' 하며 자랑을 하곤했다. 엄마는 서구형 미인이라 쌍꺼풀이 있는 큰 눈에 피부도 하얗고 학교에 오기 전에 드라이를 하고 와서 그 모습을 꼭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싶었다. 공부를 잘 하는 아들딸을 둔 엄마는 학교에 오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머니 오셨습니까?" 선생님들이 앞다투어 인사를 하면 엄마도 답례를 하고 교무실로 들어가곤 했으니까 . 어느 어버이날에는 (장한 어머니 상)도 받았다. 나는 그 상이 정말 자랑스러웠는데 엄마는 며칠 벽에 걸어두더니 어디론가 치워버렸다. 농사일에 부녀회장 일에 치여 힘들 때 장한 어머니라는 그 상이 버거웠나 보다. 자주 매를 들었고 자주 화를 내셨으니까. 부지깽이 들고 포구나무 아래를 몇 바퀴 돌던 시절이었으니까 . 작은 오빠와 나는 안맞으려고 도망가고 엄마는 끝까지 따라 와서 매를 들었다. 엄마도 엄마로 사는 것이 힘겨웠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