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유효기간
2018.8.27.(금)
호놀룰루 공항 - 인천 공항 - 집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꿈만 같던 20일이 지났다. 츤데레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마지막 짐 싣는 것까지 도와주셨다. 공항에서 달러 현금을 탈탈 털어 스타벅스 커피도 마시고 우리가 좋아하던 탄산음료 릴리코이 패션도 마셨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컵라면과 햇반을 시켰다. 애들이 먹자고 졸라서 엄마는 ‘아빠한테 물어봐.’ 아빠는 ‘엄마한테 물어봐.’ 하고 서로 미루다가 여기저기서 풍기는 라면 향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주문했다. 웬만한 기내식보다 더 맛있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전철역에 있는 떡볶이집으로 갔다. 거대한 짐으로 통로를 다 막아놓고 허겁지겁 먹었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맛이 없었다. 애들이 아직 떡볶이 한이 안 풀렸다며 우리 동네 떡볶이 집에 다시 가야 한단다.
집에 와서 그리웠던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킁킁대며 ‘바로 이거야. 역시 잠은 우리 집이야.’ 하며 감탄했다. 1분의 감격 후에 나는 바로 바빠졌다. 텅 빈 냉장고를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집안일과 육아, 기다렸다는 듯이 의무들이 몰려왔다. 이리 쉬 꺾여버릴 기쁨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차적 응이 안 돼서 새벽에 깼다. 사실 나는 새벽형 인간이라 새벽에 깨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데 내가 앉아있을 서재 방 책상에 벌써 불이 켜져 있었다. 남편이 하와이 커피와 하와이 쿠키를 먹으며 하와이 후기를 쓰고 있었다. 한국에서 하와이를 그리워하며 남편과 동틀 녘 하와이안 티타임을 가졌다.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돌아왔다고, 집에 오니 할 일이 너무 많아 여행의 은혜가 사라지려 하는 위기가 있지만, 아직도 꿈은 하와이 꿈이고 꿈을 꿀 뿔만 아니라 꿈만 같고 그렇다고.... 여행도 불안해하던 나를 응원해줘서 고맙다고.
답문이 왔다. “마음속에 여행지의 풍경과 공기 가득 담긴 아름다운 충전소 하나 생긴듯한 그 기분!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거기 들어가서 쉬다 와. 우울한 엄마보다 게으른 엄마가 훨씬 좋은 거래.” 일상으로 급하게 돌아와 현실 타격에 한 대 얻어맞은 머리는 은지의 마지막 멘트에 반대방향으로 다시 한 대 얻어맞았다.
이어서 은지가 <나는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라는 책에서 캡처한 부분을 보내줬다. “매일 청소를 안 해도, 육아 정보를 꿰고 있지 않아도, 누군가가 혀를 찰 정도로 게을러도, 그렇게 해서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어떤 엄마는 요리와 청소에 소질이 있고, 어떤 엄마는 살림은 별로지만 아이들과 즐겁게 놀 줄 압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아이에게 모범이 되는 엄마도 있죠. 뻔뻔한 엄마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연습, 할 수 있는 것만 하라! 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다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못하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 집중하세요. 우울한 엄마보다 게으른 엄마가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훨씬 낫습니다.”
저녁은 사 먹기로 했다. 부엌에서 바쁜 엄마 말고, 여유 있게 먹으면서 애들이랑 수다 떠는 엄마가 되기로 했다. 텅 빈 냉장고 따위는, 트렁크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 산더미 같은 빨래는 잊어야지.
이날 우리 동네 떡볶이는 최고로 맛있었다. 하와이에서 그리워하던 바로 그 떡볶이 맛이었다.
왜 하와이에서는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다가 집에 돌아오니 몸이 아프기 시작했을까. 목이 뻣뻣해졌고, 고관절과 엄지발가락에서는 다시 소리가 났으며, 코가 찡찡했다. 하와이에서는 다 잊고 있던 부분이었다. 온몸이 ‘이제 여행은 끝났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집안일을 다시 시작해서 아픈 걸까? 다시 시작한 홈트 동작이 무리가 된 걸까? 하와이의 기후와 공기가 좋아서 안 아팠을까? 아님 하와이에서는 노느라 아픈 걸 잊었던 걸까? 심리적인 이유일까? 그렇다면 심리적인 게 이렇게 강력할 수 있는 걸까? 똥꼬 1호와 2호는 바로 가려워하기 시작했다. 하와이에서는 매끼 콜라를 먹고, 일 년 치 먹을 라면을 다 먹어도, 집밥을 챙겨 먹지 않아도 가려워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내 관절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아이들이 다시 가려워할 때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했다.
애들 방학숙제를 포기했다. 아이들이 3일 만에 방학숙제를 다 해내는 것보다 엄마가 방학숙제를 포기하는 것이 더 기적 같은 일이다. 태풍 전 마지막 야외수영장 찬스를 선택했다. 우울한 엄마보다 게으른 엄마가 되기로 했다. 내가 잘했던 거, 애들 이야기 잘 들어주기에 집중해야지. 폐장을 하루 앞두고 한적해진 수영장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또 컵라면을 사 먹고, 하와이와 다르지 않은 우리나라 이쁜 하늘에 감탄하며 방학을 마무리했다.
여행의 기쁨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모든 걸 해결해주지 않았다. 처음엔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또 다른 기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쁨을 알아보는 눈을 여행을 통해 선물 받았다.
영화 '어바웃 타임'을 영어로 더빙하는 영어 밴드 스터디를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5분 미션 분량이 있고 녹음파일을 올려야 한다. 여행기간 동안 미션 수행을 못했고 한 주 더 실패하면 탈퇴였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삼일 만에 다시 영화파일을 열었다. 이번 주 미션은 주인공 아빠가 마지막으로 아들과 시간여행을 하는 부분이었다. 둘이 손을 잡고 돌아간 시간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 딱 지금의 우리 똥꼬1호 만할 때였다. 집 앞 바닷가를 아빠와 산책하며 물수제비를 던지고, 같이 바다 보며 나란히 앉아있는 대사도 별로 없는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펑펑 울었다. 1호, 2호와 마지막으로 타임 트래블을 하게 된다면 어디로 갈까? 우리 남편이랑 마지막 타임 트래블을 하게 된다면 어디로 갈까?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른 이유는, 나에겐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참 감사했다. 이번 여행 후로 더 많아졌다. 우리 아이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 남편도 그랬으면 좋겠다. 손잡고 해변을 거닐던 그 때로도 좋다. 같이 파도를 타던 그때도 좋다. 같이 재즈음악을 듣고 드라이브하며 석양을 보던 그때도 좋다. 어느새 시차에 적응해서 아침까지 쿨쿨 잘 자는 남편 옆에 가서 가만히 누웠다. 손을 잡았다. 남편이 놀라서 ‘왜 울어?’ 하고 벌떡 일어났다가 영화 보다가 그런다니까 ‘깜짝 놀랐네.’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그 후로도 한참을 울었다. 울지 말라는 뜻으로 연신 내 손을 문질러주다가 스르르 잠이 든 남편을 보고 울다가 웃다가 했다.
감사와 경이로움에 대한 감각이 회복된 여행이었다.
그래서 바로 이어진 가을에 나는 더 자주 멈추어 서서 감탄을 했고, 사진을 찍었고, 메모장을 펼쳤다. 하와이가 아닌 우리나라 우리 동네에서 말이다.
여행의 은혜는 지금 여기서도 계속된다.
슈퍼거북의 하와이 여행일기는 에필로그 한 편을 남겨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