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1)
첫째가 중학생이 되기 전에 집을 옮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내가 생각한 전학할 수 있는 마지노선은 5학년 겨울방학이었다. 그리고 아무 대책 없이 5학년 12월이 되었다.
내가 대학생 때부터 살던 집이고, 결혼한 후에 친정부모님께 이 집을 샀고, 이 집에서 두 아이가 태어나고 자랐다. 나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집이다. 정을 뗄 수가 없어 외면하다가 '우리 이사는 안 가기로 한 거지?' 하는 남편 말에 마감기한을 한 달 남긴 이사 고민을 시작했다. 지금 옮기지 않으면 나는 이 집에서 평생 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00일간의 정리 페스티벌(https://brunch.co.kr/@blessed0594/42)에 참여한 후, 이 집은 리즈시절을 맞았고 집 팔기 벼락치기에 도전해 볼 수 있었다. 우리 집도 팔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처음으로 들었다.
우선 마음에 두고 있던 동네로 집을 알아보러 갔다. 지금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였다.
내가 원하는 집은
초등학교, 중학교가 가까울 것
도서관, 수영장이 가까울 것
초록(산이나 공원)이 가까울 것
해 잘 드는 남향
인테리어가 어느 정도 되어있을 것: 우리 둘째는 아토피가 있다. 새집증후군을 피해야 한다.
부엌과 거실이 트여있을 것: 부엌에서 거실에 있는 아이들을 보고 싶고 거실 TV 소리를 나도 들을 수 있고, 부엌에 있는 엄마가 고립되지 않아야 한다.
아이들 방 하나씩 줄 수 있는 집: 사춘기가 시작된 초5 첫째 아들에겐 자신만의 공간이 절실해 보였다.
그렇다. 내가 원하는 집은 한마디로 비싼 집이었다.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지 딱 일주일이 되던 날 우리 집을 내놓았다. 자금을 마련하려면 지금 사는 집을 파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사 갈 집은 계속 알아는 보되 구매는 그 후에 진행하기로 했다. 집을 내놓았다고 하자 둘째는 펑펑 울었다. 자기는 청소도 안 할 거고 자가격리자가 살던 집이라고 소문낼 거라고 엄마를 협박했다.
한 신혼부부가 첫 번째는 부부끼리, 두 번째는 부모님까지 모시고 우리 집을 보러 왔다. 집을 내놓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보러 오는 사람이 꽤 있는 데다가 두 번씩 보러 오는 사람도 생기니 이러다가 정말로 팔리는 게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이사 가려고 알아보는 집은 고민하는 사이 매물이 급속도로 없어졌고 천만 원을 깎아보려고 부동산에 전화하면 천만 원 올랐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도 나는 이사 가려는 곳이 비싸지고 없어지는 것보다 우리 집과 헤어질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됐는데 팔려버리면 어쩌나 그게 더 걱정이었다.
이사 갈 곳 매물을 보러 다니는 일과 우리 집 보여주기를 병행하는 일은 상당한 에너지와 시간이 들었다. 하지만 집을 보러 다니면서 어떻게 해야지 집이 잘 팔릴 수 있겠다는 팁도 얻었다.
부동산 사장님이 자주 하시는 말이 있었다. "기운이 좋은 집이에요. 잘돼서 좋은대로 가요." 사람들은 그 집의 외관만큼이나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주인이 없을 때보다 주인이 있을 때 집을 보고싶었다. 아이들이 웃고 있는 집, 특별히 인테리어가 세련되지 않아도 정돈되고 관리된 집, 냄새가 좋은 집이 좋았다. 집을 팔려면 고구마나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라고 했는데 막상 현실 부동산 시장에서 그런 집을 만나지는 못했다. 나는 찐한 청국장 냄새와 갓 만들어진 주먹밥에서 나는 참기름 냄새도 커피향 만큼이나 좋았다. 담배 냄새가 너무 배어서 급하게 사방에 양초를 피워둔 집은 들어갈 때부터 이 집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에 주먹 자국이 그대로 나서 깨져있거나, 가족사진 속 얼굴이 다 어둡거나, 고장 난 채 방치된 집은, 시세보다 싸도 꺼려졌다.
쇼 호스트처럼 각 방 문을 열면서 설명해주는 애기 엄마네 집이 그래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해가 이~까지 들어와요 하고 환하게 웃던 얼굴이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이 집을 보러 갈 때 손주들 보러 오신 외할아버지를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할아버지는 '왜 판다고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안 팔았으면 좋겠는데' 하며 그 집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할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씨앗 호떡이었다. 딸과 손주들 먹이고 싶어서 퇴근길에 산 따끈따끈한 호떡을 배달 중이었던 것이다. 애기 엄마가 되고서도 사랑받는 딸이 살던 집! 나에게는 이 집이 그렇게 기억됐다. 가족 수대로 고리가 있던 나무 마스크 걸이대도 다복하게 느껴졌다. 결국 이 '씨앗호떡집'이 우여곡절 끝에 우리 집이 되었다.
집을 10개쯤 보고 나니 우리 집을 보여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것 같았다. 우선 청소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때 하는 청소는 천만 원짜리 청소라고 한다. 비우고 또 비웠다. 식탁 위, 싱크대 위, 거실 테이블 위 등 우리 집 스카이라인을 클린스팟으로 유지했다. 커피는 못 내려도 환기를 자주 시켰다. 겨울이라 창을 열면 온도가 내려갔지만 아무리 급해도 환기를 꼭 시켰다.
누가 집 보러 올 때마다 아이들에게 인사 예쁘게 하라고 했는데 이건 지켜지지 않았다. 집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아이들은 누가 올 때마다 또 보러 오냐며 화가 나있었다. 둘째는 계속 전세를 외쳤다. 어디서 배웠는지 '파는 거 말고 전세!'라고 했다. 인생의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우리 둘째는 예술혼을 불사른다. 자가격리됐을 때 '코로나 물러가라' 포스터를 만들었던 둘째는 이번에도 물감을 꺼내들더니 '집 안 팜' 포스터를 만들었다. 나는 누가 집을 보러 올 때마다 '집 안 팜' 포스터가 붙어있는 의자를 안 보이게 돌려놓아야 했다.
집을 내놓은 지 3주도 안돼서 집이 팔렸다. 둘째는 대성통곡했다. 안아주는 걸 뿌리치기는 처음이다. 봉투에 우리 집 동호수를 적고 이 집을 다시 사기 위해서 돈을 모으겠다고 했다. 통장을 꺼내 자기한테 49만원이 있는데 얼마를 더 모아야 하냐고 했다. 억 단위에서 49만원을 빼는 계산은 초3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이사 가서 자기 방이 생겨도 싫단다. 형이랑 같이 자고 싶단다. '나 용돈 안 줘도 되니까 이사 안 가면 안돼?' 우리 집 평면도를 그리고 '*억이 필요해.' 라고 적었다. 자기가 꼭 다시 이 집을 살 꺼라고 했다.
둘째를 토닥토닥 달래며 엄마도 눈물이 났다는 사실을 애들은 알까? 사실 나도 두렵다. 나는 이 집에서 정말 행복했다. 결혼 전, 결혼 후 나의 역사를 모두 갖고 있는 집이다. 17년을 살았다. 같은 단지 옆 동에서 산 기간까지 합치면 이 동네에서 27년을 살았다. 대학생 때부터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었고, 동생이 독립한 후 다시 다섯 살 아기처럼 부모님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집이었다. 내가 결혼한 후 부모님은 이곳 생활을 접고 귀농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집이 도무지 팔리지 않아 우리가 이 집을 샀다. 우리 남편이 처음으로 부모님을 만난 집이다. 그리고 똥꼬 1호, 2호가 태어난 집이다. 누구보다 완강하게 이사를 반대했던 첫째는 이미 결정돼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는지 의연한 척했다. (하지만 막상 이사를 가고 나서 누구보다 혹독한 적응기를 보냈다. )
우리 집을 산 사람은 서른 살의 젊은 아가씨였다. 인테리어 전문가였다. 그냥 전문가가 아니라 인테리어 사업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고친 후 세를 줄 거라고 했다. 인테리어 전문가에게 '조금만 고치면 충분히 괜찮은 집'으로 인정받은 거 같아서 떠날 집인데도 기분이 좋았다. 추운 것 빼곤 내가 너무 사랑했던 집이라 3년 전 모두가 비추하는, '살면서 하는 공사'를 했다. 거실이 확장되어 있었는데 베란다 부분의 마루를 뜯어내고 베란다를 다시 만들었다. 전체 창호와 주방 공사를 했다. 우리에겐 충분히 따뜻하고 편한 집이 됐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의 눈에 우리 집은 여전히 동향에 사이드, 체리 몰딩 집일 것이다.
부동산 사장님이 계약서를 작성하시는 동안 이 집 살면서 있었던 좋은 일을 얘기하라고 했다.
나는 신나서 얘기했다. 내가 결혼 전에도 살던 집인데 결혼 후에도 살면서 두 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자랐다. 집이 팔렸다고 하자 아이들이 엉엉 울었다. 전망이 정말 좋아서 해 뜰 때, 해질 때마다 감탄할 수 있는, 부엌에 난 창으로 요리하면서 하늘을 보고, 학교로 뛰어가는 아이를 설거지하며 내다볼 수 있는, 봄에는 벚꽃이, 가을에는 단풍이 온 창에 담기는 사계절이 다 있는 집이라고 자랑했다.
동향이었지만 나에게 이 집은 그전에 살았던 그 어떤 남향집보다, 그 어떤 큰 집보다 밝게 느껴졌다. 제일 큰 평수 살 때 제일 어두운 터널을 지났던 나는 그래서인지 서로 뚝 뚝 떨어져 있는 큰 집보다 지금처럼 복작복작 작은집이 좋다.
누군가가 떠나가기 싫어서 펑펑 우는, 애착을 가진 집.
부동산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 집의 매력은 그것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