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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Mar 02. 2022

샤넬 오픈런, 나도 하게 될 줄이야

명품 소비에 대한 단상

 어느 날,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곧 결혼할 예비신랑한테 샤넬 코코핸들 가방을 받고 싶다는 것. '샤알못'이던 나, 격한 공감을 보내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샤넬 치고는 나름 합리적인 가격에, 핸들도 겸비돼 손에 들고 다니기 좋아 보였던 그 가방. 그날 이후 나도 샤(넬에 스)며들었다. 

 

 빠지기 시작하니 수시로 명품 카페에 들어가게 됐다. WOC, 클똑, 금장이니 은장이니 생소했던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섭렵됐다. 그리고 마침 집에 있던 백화점 상품권을 보태 '나도 샤넬 가방 하나 사보자'라는 꿈을 꾸게 됐다. 샤넬을 보다 보니 다른 명품백들은 눈에 차지 않았다.


 그런데 어쨌든 샤넬을 손에 쥐려면 오픈런이란 걸 해야 했다. 백화점 문 열기 전부터 기다린 뒤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내 차례를 불러줄 때까지 어디에선가 기다리는 일. 이른 번호를 받기 위해 소위 '노숙런'이라는 걸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언제, 어떤 제품이 매장에 입고될지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앞 번호를 받는다고 능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됐든 '오랜 기다림'은 피할 수 없는 관문이었다.

 

 옛날 옛적 아이돌 팬클럽 활동을 해 본 나로선, 기자로서 취재해야 하는 인물을 오래도록 기다려본 나로선, 밖에서 기다리는 행위의 고생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명품이 뭐라고. 기다리는 데 시간을 쏟는 게 어딘가 모양 빠지는 일 같았다. 


 가방에 눈이 먼 나는 이런 고민을 결국 '한 번은 체험해보고 싶다'는 긍정적인 최면으로 둔갑시켰다. 원하는 가방을 사든 사지 못하든 한 번쯤은 이 오픈런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또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고는 싶었는지 '새벽런'은 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이 덜 붐빈다는 월요일, 평소 출근하는 것처럼 출근시간대에 줄을 서기로 했다.


 드디어 대망의 그날. 내가 도착했을 때는 오전 8시 40분쯤. 이미 40여 명 정도 줄이 늘어서 있다. 슬쩍 참전했다. 의자, 텐트, 담요 등등 사람들이 챙겨 온 장비들이 대단하다. 나는 장갑과 핫팩,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2시간을 버텼다. 대기하면서 책을 꺼냈지만 시간은 좀처럼 잘 가지 않는다. 오전 10시가 되니 한 남자가 나와 차례로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를 등록하고 사라진다.


 이후 매장 입성까지의 긴 기다림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여러 매장들을 둘러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내 번호는 40번대였는데 오후 3시 반쯤이 돼서야 매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내 뒷번호들은 언제쯤 매장에 발을 디딜 수나 있는 걸까.


 들어갔지만 원하는 가방은 역시 없다. 그런데 남아 있는 다른 가방이 꽤 마음에 들었다. 디피용이라고 했지만 이거라도 집어들 수밖에. 또 언제 오겠냐면서 반지갑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 보니 마음에 들지 않고 로고도 비뚤게 박혀 있다. 고민 끝에 지갑은 환불을 하기로 했다. 환불을 하러 또다시 찾은 백화점. 이날도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어김없이 질주(run)를 하고 있었다.


 오픈런을 하면서 다행스럽게도 도덕적인(?) 결론을 얻었다. 샤넬만 들이면 명품 욕구가 사그라들 줄 알았는데 다른 색, 다른 사이즈, 다른 종류의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오픈런의 고생스러움 때문인지, 매장 내에서 소비할 때도 그다지 대우받는 느낌이 없어서인지, 이 상황들을 무릅쓰고 더 사고 싶은 마음으로까진 이어지지 않았다. 명품을 명품답게 소비할 수 없었고, 소비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독이었다.


 그렇다고 '오픈런' 자체를 폄훼하고 싶진 않다. 내가 사고 싶은 게 있고 그 물건에 마땅한 돈과 시간을 투자할 용의가 있다면, 오픈런에 참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행여 후에 사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그것이 단순히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결핍이나 우월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 마음은 통제하고 싶다. 나는 내가 걸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나 자신. 적절히 사회인으로서 나를 가꾸는 건 필요하지만 내 분수나 필요 이상으로 소비하는 건 사치란 생각이 들었다.


 최근 유튜브에서 한 연예인의 가방 유튜브를 보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가방들을 쭉 나열하면서 소개를 시작한다. 자랑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비싼 명품 가방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가방은 낡았지만 나는 이렇게 든다"며 자신만의 멋으로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건이 명품인들 내가 명품이 아니고서야. 유행은 돌고 돌고 사람의 욕구는 끝이 없다. 채워지지 않는 독에 허우적대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한 동물이라 이 같은 마음가짐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다. 아직도 그 명품 카페는 가끔 들락날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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