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증 우울증 극복기 두 번째] 치료하지 않은 상처가 곪아서 되돌아왔다.
경증 우울증 극복기 첫 번째를 쓰고 나서 3주 동안 나름대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래도 스물아홉의 아홉수를 이렇게 보내면 무난한 편이라고 자기 위안을 해본다.
3주 전, 회사에서 스트레스 검사를 받았다. 전문가에게 그림 검사, 문장 검사, MMPI-2, MBTI 검사를 받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나는 스트레스가 별로 없고, 잘 통제한다고 생각했는데, 심리 상담가의 말로는 스트레스가 굉장히 많이 쌓여있는데, 이를 회피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했다. 내 결과지를 보는데 본인의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갑자기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노력했는데 이게 회피하는 거였다니,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스트레스 관련 책도 읽고, 의사 선생님에게도 여쭤보니 그 상황을 합리화하고,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성숙한 방어기제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을 때는 내 마음이 행복해지는 취미 활동을 해서 풀고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내가 스트레스가 많고, 미성숙한 방어 기제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병원에서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내 우울 증세가 큰 사건 없이 서서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선생님이 혹시 원인으로 예상되는 사건이 없는지 물어보자마자 바로 한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올해 2월, 전 직장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염문에 휘말려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상대방 남자의 이름만 알려지고, 내 이름은 퇴사한 누군가로만 소문이 났지만, 난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 얘기인 걸 알았다. 이 얘기를 해 준 사람도 내가 당사자인지 모르고, 그 남자 직원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며 꺼낸 얘기였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그 소문을 낸 사람이 나랑 친하고, 한때는 나를 좋아했던 남자 동기였다는 걸 알고 배신감에 분노했다. 그런 수준 낮은 사람들이랑 얽혔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나는 지금 이직해서 행복하게 잘살고 있으니까 그런 덜떨어진 사람들은 무시하자고 다짐했다. 큰 상처를 받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상처받은 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3개월 후, 내가 왜 그런 사람하고 엮였는지 갑자기 자책감이 밀려오고, 침대에 누웠는데 눈물이 나왔다. 전 직장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은 그 소문을 들었을까? 당사자가 나라는 걸 알까? 블라인드에 글이 올라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갑자기 감정이 밀려오는 게 당황스러웠고, 마음이 힘들어서 심리 상담을 받았다. 상담사는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물어보며, 어릴 적 결핍이 이런 고통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어릴 적 내 트라우마에 초점을 맞추느라 지금 받은 상처는 치유하지 못했고, 그때 치료하지 못한 상처가 곪아서 이번에 돌아온 것이다.
소문을 낸 사람이나, 나한테 상처를 준 그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살고 있을 텐데,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한다니 억울하고 분했다. 의사는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분리할 수 있는 약을 처방해줬다. 트라우마로 남아서 기억과 감정이 꼭 붙어있는 채로 저장되면,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 트라우마로 남은 그 사건까지 기억나서 더 힘들어진다고 했다.
약을 먹어서 아픈 마음을 치료하면 약을 끊었을 때 더 힘들지는 않을지 걱정됐다. 의사는 그건 본인이 걱정할 일이고,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어떻게서든 나를 덜 힘들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몇 번 만나지는 않았지만 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감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