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증 우울증 극복기 네 번째] 조건없는 행복을 찾아서
2020년 연말에 휴가를 길게 제출해서 15일 동안 출근을 안 했다. 길게 쉬면 다시 회사가 좋아질 거라고 기대했는데, 막상 출근할 날이 다가오고 일할 생각을 하니 숨이 막혔다. 계속 재택근무를 해서 그저 일만 하면 되는 상황인데도 그냥 다 싫었다. 이직할 때가 아니니까 아무 생각 없이 다니자며 스트레스를 꾹꾹 누른 게 터진 것 같았다.
휴일 마지막 날 병원에 방문했다. 요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냐는 물음에 회사 이야기를 꺼냈다. 어려운 일을 주면 다른 팀원들은 못 하겠다고, 안 된다며 포기하는데, 나는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서 꼭 해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옥죄어서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에 그 일을 해내면 다른 더 큰 어려운 일이 나에게만 돌아오는 것도 부담스럽고, 포기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내가 답답했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삶은 일과 삶의 균형이 맞고, 회사 생활은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게 하고 싶은데, 완벽주의 성향으로 괴리가 생겨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강박 증세가 있는 것 같다고, 혹시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는지, 그리고 본인에게 성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과도하게 높은 기준을 세우고 있지 않은지 물어봤다. 둘 다 맞았다. 자기 전에 가스, 창문, 현관문을 5번 넘게 확인하고, 분명 확인했는데도 침대에 누워있다가 일어나 다시 확인하고 잠든 적도 많았다. 그리고 남들보다 양심의 기준이 높고, 양심에 찔리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에, 어쩌다 도덕적이지 못한 일을 저지르면 자괴감에 빠져 몇 날 며칠이 우울하다. 생리 전 기간에는 예전에 한, 내 기준에 비도덕적인 실수들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많고, 심한 날은 울기도 했다.
그다음엔 어떨 때 행복한지 질문을 받았다. 행복했던 순간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 이직에 성공했을 때 등 무언가 큰 성취를 이루었을 때였다. 선생님은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친한 친구들을 만나고 나서 행복하지 않은지 다시 물어봤다. 하지만 나는 일상에서 그런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친한 친구를 만나는 게 왜 행복한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럴 때 행복한지 의문이 들어서 혼란스러웠다.
결국 강박과 관련된 약을 추가로 처방받았다. 약의 종류가 많아질수록 나중에 약을 끊을 수 있을지, 약을 끊고서는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됐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우울할 땐 뇌과학'이라는 책에서 우울증약은 뇌의 회로 자체를 우울증에 빠지지 않게 바꿔주는 약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다고 된다고 해서 한시름 덜었다. 선천적인 영향으로 또는 어릴 적 결핍으로 인해 삐뚤어진 뇌 회로를 약이 바꿔준다고 하니 다행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행복에 대한 고민이 떠나지 않았다. 예전에 하루에 세 가지씩 쓴 행복 일기를 찾아봤는데, 거기에도 성취에 대한 이야기만 있었다. 그동안 나에게 행복 = 성취였다. 기준을 바꾸고, 마음의 문을 열어 일상 속에서 인지하지 못했던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좋아하던 빵집의 식빵을 오랜만에 먹었는데 맛이 그대로여서 행복했고, 우연히 읽은 책이 재밌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작은 독립 서점에서 책을 사면서 단편 소설 인쇄본과 바게트 모양 포스트잇을 받아서 행복했다. 행복이 이렇게나 가까운데, 지금까지 모두 놓쳤다는 게 아쉬웠다. 한편으론 앞으로 찾을 행복이 크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일상이 기대됐다.
병원에 가기 전에는 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내 인생에서 고칠 점은 이미 다 고친 완성형이라고 자만했는데, 인식하지 못했던 개선할 점이 참 많다. 그래도 병원에 다니면서 내 감정이 많이 나아지고 있는 게 몸소 느껴지고, 성장하는 재미가 있어서 이것마저 행복하다.
긴 휴가 끝에 출근한 날, 메모장에 회사 생활이 힘든 이유를 적어봤다. 신기하게도 글로 써서 정리하고 나니까 일할 의욕이 생겼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