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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Dec 10. 2022

05. 탓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강박과 불안으로 힘들 때마다 엄마의 부재와 뒤늦게 시작한 심리 치료를 떠올렸다. 어린 나이에 비극을 마주하고, 어른이 되어서야 치료를 받았으니 당연히 힘들 수 있다고 스스로를 보듬었다. 친구들과 달리 나만 왜 이 모양인지 납득할 수 없을 때마다 나 자신에게 설명해 주어야 했다. 과거를 탓하는 방법이 가장 쉬웠다. 고통으로 기억된 온갖 과거 장면들을 끌고 왔다. 실제로 이 방법은 증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소중한 사람이 죽을까봐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할 때면 어릴 적 엄마가 갑자기 떠났던 잔상이 남아 아직도 이러려니 생각하며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과거로 돌아가고 또다시 돌아가도 긴 세월 동안 만들어진 단단한 벽을 깰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벽을 더 두텁게 만들 뿐이었다. 아픔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과거가 아닌 현재에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머리로 알고 있지만 사고의 흐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이별 과정에서 연인이 힘겹게 건넨 한 문장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이제는 너의 불안, 강박, 우울이 버거워


심장 깊은 곳이 아팠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우울하다는 이유로 먹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던 나와 긴 시간 고통을 함께 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웠던 시절 자존심이 센 나는 불안해서 모임에 못 나가는 것은 증상에 대한 굴복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와 함께 꾸역꾸역 모임에 나갔다. 친구들에게 시시 껄껄한 농담을 던지는 내내 식탁 밑에서는 차갑게 떨리는 손을 웅켜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손수 내게 밥과 찌개를 떠먹여 줬다. 그 사정을 알 리 없는 친구들은 오늘따라 둘이 꼴 보기 싫도록 유난스럽다는 장난스러운 비난을 던졌다.

자다가 일어나 나쁜 짓을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잠 못 드는 밤들도 많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푹 잘 수도 없었다. 물론 옆에 있는 사람도 덩달아 잠을 설쳤다. 불안감이 극도로 치솟는 날이면 긴 줄을 찾아 그의 팔목에 내 팔목을 꽁꽁 손을 묶어야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이런 상대가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길을 내어주는 것이 도리였다.


사실은 좋은 시간도 많았을 텐데 냉정하게 이별을 고하는 모습에 야속하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스스로를 돌아볼수록 담담하게 받아들일  있었다. 아주 천천히 증상이 완화되고 있었을지 모르나 마음속 깊은 에 있는 '내가 이렇게 힘든  당연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극복보다 안주에 무게를  수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다. 물론 장기 연애의 헤어짐에는 좁힐  없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런 나의 자세가 한몫을 했다고 본다.


10년 가까운 연애를 정리하면서 과거에 집중해 현재의 고통을 당연시하면 소중한 것을 잃을 수 있다고 배웠다. 그게 사람이든 시간이든,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든 말이다.


전문가의 상담과 소중한 친구, 가족, 연인은 존재 자체 만으로 아주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스스로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솔직히 평생 동안 내가 힘들 수밖에 없는 과거 이야기만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 내게도 더 이상 탓할 수 없는 순간은 왔다. 결국 회복의 마지막 라운드는 개인전이다. 내 인생 보석과 같은 지금의 남편에게 과거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 함께 그리는 현재와 미래에 집중하는 이유다. 지금을 이야기할수록 습관처럼 과거를 돌아보던 나도 다시 또다시 현재를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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