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빠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주식투자라는 이젠 신파극에도 나오기 어려운
뻔하디 뻔한 잘못 때문에
어릴 적엔 그래도 화목했던 기억이 있던 것도 같던 가족은
서로 만날 때마다 분노를 삭여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빠는 대기업에서 30년을 넘게 일하셨다.
친할아버지는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 장남이라고 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은 것 눈치 안보며 먹고, 서울로 '유학'도 보내주셨다.
공부도 곧잘 했는데 의사는 피를 보니까 무서워서 안되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그 기업은 뭔가 딱딱할 것 같은 그 분위기가 싫었다.
그래서 들어간 회사, 그래서 30년을 다닐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번 돈이 얼마래도, 자신이 입는 것엔 극도로 돈을 아끼셔서
변변찮은 외투 하나 없고
내가 사드린 20만 원짜리 운동화는 아깝다고 신지도 않으셨다
신은 적도 없는데 세월을 묻어 누레지는 운동화를 보면
저걸 뒀다 어디 써먹으려고 하나 싶기도 했다.
아빠를 보면 짠한 마음이 들면서도 화가 났다.
차라리 쇼핑이나 펑펑해서 겉모습이라도 번지르하게 하지.
명절에 모여 화투판이라도 벌어지는 날이면
할머니는 항상 아빠가 저렇게 떼돈 벌려다 망하는 거라고 혀끝을 차셨다.
본인이 키우신 아들이라 그런지 할머니는 정확했다.
어릴 땐 아빠랑 같은 학교에 가고, 같은 회사를 가는 게 내 목표였는데
이젠 아빠 같은 남자만 만나지 말자가 모토가 되어버렸다.
집 앞에서 만나도 바닥으로 눈길을 돌린 지 3달째,
친구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부고를 듣고 서둘러 짐을 챙겼다.
지방에서 상을 치러서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 와중에 일은 왜 이리 많은지 도저히 장례식이 있어 빨리 퇴근해보겠다는 말이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친구들과 비행기 몇 대를 먼저 보낸 후,
오후 7시쯤 김해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아직 친구들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게 익숙하지 않은 나이였다.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어떤 식으로 그 사람을 위로해줘야 할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너무 격식만 차렸고
"건강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럽게..."라는 얘기는
나 또는 주변 사람들 호기심을 채우는 용도밖에 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사이가 유달리 좋은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부러워하던 '딸바보 아빠', '아빠바보 딸'이 있는 집.
내가 어릴 때 얼마나 아빠를 좋아했고 닮고 싶었든 간에 우리 집은 그런 집일 수가 없었다.
3달여 만에 처음으로 아빠한테 건넨 말은
"내 친구 아빠 돌아가셨대."였다.
사실 아빠가 잘 아는 친구도 아니었다.
말하고 어딜 가야 할 나이도 아니고 의무감도 없는 사이인데,
왠지 전해야 할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친구 아버지의 부고는 화해라고 하기도 웃긴 대화의 시작, 그런 것이 되었다.
있을 때 잘하자라는 마음이 든 것도 아니었고
아빠가 없을 세상을 생각하니 슬퍼진 것도 아니다.
그냥 모든 화내는 행위와 분노로 가득한 집안의 분위기가 토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