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세상을 알아가다.
1985년 3월 초강초등학교 1학년 1반 교실 담임선생님은 세 글자가 적힌 종이카드를 내 눈앞에 내밀었다. 당시 까막눈이었던 나는 당당하게 ‘몰라요!’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소심한 성격에 부끄러운 고갯짓만 할 수 있었다. 엄마가 특별히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서 까막눈인 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시험지 한 장이 대문에 꽂혀있는 학습지도 받았고, 휴일에 한글도 가르쳐보려 했으나 신념이 확고했던 난 골목을 택했다.
입학식 날 선생님이 내밀었던 카드에 아버지라고 적혀 있었단 걸 나중에 알았다. 아마 엄마는 일곱 살임에도 동화책을 줄줄 읽어내던 옆집 종석이 때문에 불안해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곧 학교 성적이 종석이를 뛰어넘자마자 엄마는 내 학업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사실 나의 글 선생은 따로 있었다. 그 글 선생은 매달 정해진 날에만 찾아왔다. 떠나지 않고 계속 우리 집에 있었지만 다음 달에는 새로운 글 선생이 또 찾아오는 바람에 헌 선생이 되고 말았다. 새 선생은 또 헌 선생이 되고 또 다른 새 선생이 찾아오고……. 글 선생은 막내 고모 손에 들려왔다. 막내 고모는 은행원이었다. 매달 새로운 글 선생을 데려오는 막내 고모가 제일 부자라고 생각했다.
글 선생을 펼치면 그림과 글이 가득했다. 글 선생 덕에 어려운 낱말도 척척 읽고 쓰게 되었다. 글을 깨치지 못하면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열심히 열심히 깨칠 때까지 읽었다. 그때 만난 ‘날아라 슈퍼보드, 아기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요정 핑크’ 등은 이후에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어 텔레비전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아 참, 글 선생의 이름은 월간 보물섬이었다.
글 선생 덕에 글을 깨친 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집에는 내가 읽을 책 한 권이 없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시립도서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엔 재수생, 고시생, 입시생들이 새벽 6시마다 길게 줄을 서 있어서 어린이가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찾은 도서관은 친구네 집이었다. 우연히 놀러 간 친구네 방에 전집들이 좍 꽂혀 있으면 금광이 따로 없었다. 아이들이 숨바꼭질과 술래잡기에 심취해 있는 동안 난 그 전집들을 다 읽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언제 또 이 친구 집에 놀러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친구들이 오래오래 놀아주길 바랐다.
1987년 초등학교 3년 2학기에 난 남경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를 하던 아빠가 어깨를 다친 바람에 새 직장을 구해야만 했다. 아빠가 야간 수위로 일하게 된 초등학교 사택에 우리는 새 보금자리를 열었다. 부끄럽게도 낮에는 친구들이 우리 아빠를 알게 될까 전전긍긍했고 밤에는 아빠 백으로 학교도서관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어 행복해했다.
그곳에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모리스 르블랑의 루팡,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등 추리 소설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잠시 잠깐 형사나 탐정 등을 꿈꾸기도 했다. 그때부터 추리물에 대한 무한 애정이 시작된 것 같다. 책은 물론 영화나 드라마도 추리물이라면 닥치는 대로 빠져들곤 했으니까.
“윤아 걱정하지 말고 가자. 나쁜 곳 아니라니까. 나만 믿어.”
1989년 5학년 4반 진경이는 날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 그곳은 학교 도서관과 달리 아늑하고 따뜻했다. 책들은 일목요연하게 장르별로, 작가별로 아름다운 자태를 내뿜으며 정리되어 있었다. 이미라, 강모림, 황미나, 신일숙, 강경옥, 김진, 원수연, 박희정, 이은혜, 김혜린 등 무수히 많은 작가들을 만났다. 그 후로 만화방은 학교를 마치면 꼭 들러야 하는 필수코스가 되었다.
보고 싶은 만화들을 가방에 넣을 수 있을 만큼 빌린다. 과자와 음료수를 산다. 진경이네 방으로 간다. 배를 깔고 엎드린다. 만화책에 빠져든다. 아쉬워하며 다음 주를 기약한다. 아마 가장 행복한 몰입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이제 그때의 나만큼 자란 딸 현과 함께 만화방을 간다. 엄마가 사랑했던 작품들을 추천해주고 함께 말랑말랑한 순정만화의 감성을 나눌 것이다.
1991년 중학생이 되니 꼭 읽어야 할 책들이 생겼다. 교과서에 실린 작품이나 관련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가야 했다. 재미없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었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그때 만난 단비 같은 작품이었다. 독립적이고 열정 가득한 제인의 삶에 푹 빠져 날밤을 새고 책을 읽다 코피를 쏟고 말았다. 친구에게 빌려 읽은 터라 새 책을 사줘야 했지만 내 용돈으론 무리였다. 결국 엄마에게 부탁을 해서 코피를 쏟은 하권을 새로 사줬고, 우리 집 책장에는 제인 에어 하권만 꽂히게 되었다.
1994년 고등학교 1학년 수학 시간이었다. 당시 월드컵 기간 중 마침 한국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수학 공부가 하기 싫던 아이들은 선생님께 텔레비전을 틀어달라고 졸랐다. 이미 난 책상 아래로 토지를 읽고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수학선생님은 수업을 강행하셨고 선생님께 실망한 난 수포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토지도 끝까지 읽지 못했다. 다 수학 선생님 때문이다.
2016년 마흔을 일 년 남겨두고 난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혼자서 하던 책 읽기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게 되었다. 책으로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나에서 우리가 되었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보물섬 글 선생이 인생 선생이 된 순간이다.
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다. 책을 엄청 좋아하지도 않는다. 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고 드라마도 좋아한다. 만화도 좋아하고 뮤지컬도 좋아한다. 아마도 난 이야기로 된 모든 콘텐츠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제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도 재미가 생겼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또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내 삶에 책은 어떤 존재일까?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다리 같기도 하고, 세상과 나를 분리해주는 담벼락 같기도 하다. 책을 좋아하진 않지만 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다. 파우스트는 어렵지만 몰입은 재미있다. 시는 어렵지만 에세이는 편하다. 책은 그냥 다양한 친구들이 모여 있는 나의 영원한 교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