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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씨 Jul 24. 2020

일곱의 쌤과 하나의 톰

그림일기 두 번째 이야기

     

버리겠다 마음먹는다고 버려지는 욕심은 욕심이 아닐지어다.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 긴장해야 하는 것처럼 뭐든 내려놓는다는 것은 겁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림일기쓰기 3주 차에 접어들었다. 욕심은 더욱 커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열정도 같이 올라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림일기 멤버는 총 여덟 명이다. 4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모였는데 막내라인에 들었다는 사실은 큰 기쁨이었다. 나이를 떠나 동등한 호칭 중에 가장 편하게 써왔던 것이 선생님이었다. 그것을 줄여 ‘쌤’ 이라고 했다. 각각의 이름 뒤에 붙여 OO쌤, 이렇게 지난 모임들에서 불렀다. 그림일기 모임에도 자연스레 적용되었다. 동명이인의 구별을 위해 김지연 작가는 자신을 톰으로 불러 달라 했다. 그렇게 일곱의 쌤과 하나의 톰이 만났다.   

  

2주 차에 멤버들은 과외라도 받고 온 것인지 아마추어의 수준을 뛰어넘은 실력과 열정을 보여줘 날 크게 좌절시켰다. 솔직히 지인들에겐 내려놓았다느니 스트레스가 심하다느니 온갖 투정과 허세를 부렸지만 아니었다.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욕심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열정도 노력도 더해지지 않을까.      


초보자들이거나 실력이 없는 이들이 한다는 ‘장비 빨’을 목수가 연장을 탓하는 그 짓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양한 크기와 갈라지지 않는 좋은 재질의 붓이 필요했다. 언제 어디서나 착 펼쳐 들고 색을 칠할 수 있는 고체 물감과 미니 팔레트, 워터 붓을 샀다. 수채화의 느낌을 낼 수 있는 수성펜을 사고 농도가 다른 2B, 4B, 6B 연필들도 샀다. 손바닥만 한 드로잉북 외에 연습을 할 수 있는 조금 저렴한 노트들도 샀다. 연필 위에 덧칠할 드로잉 펜을 굵기 별로 사고 똥이 나오지 않는 지우개도 사야 했다. 그래도 앞으로 사야 할 게 훨씬 많이 남았다는 건 기쁨이자 슬픔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굴러다니던 색연필로 파스텔 그림 흉내내기.. 글쓰기로 감각적으로 보이게 하고팠으나 많이 모자란 느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의 공통점이 엉덩이라면 차이점은 돈이지 않을까. 그림은 엉덩이만으로는 할 수 없었다. 실력이 없을수록 장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더 좌절하게 된다는 사실이 딜레마였다. 발색이라도 좋아야, 연필이라도 부드러워야, 붓이라도 세밀해야 더 잘 그려질 수 있으니 말이다.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그림 그리기를 만난 이에겐 적어도 그래야 했다.  

    

이번 주차는 세 버전으로 그리기였다. 한 장소를 다른 세 시간대에 그려본다던지, 한 물건을 다른 세 각도로 그려본다던지 하는 것이었다. 초보의 가장 큰 어려움은 시작이다. 글을 쓸 때 어떤 글감이 딱 들어와서 망설임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게 될 때가 있다. 하지만 쓰고 싶을 때와 달리 써야만 할 때는 글감 찾는데 오 할 이상의 시간이 든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일단 어떤 걸 그려야 내가 세 버전으로 가능할까를 찾는 데에만 5일이 지나버렸다. 최근 한 달간의 일주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빨리 흐르고 있었다.      


목요일 밤에는 숙제를 올려야 했다. 수요일 마감 임박이지만 정하지 못했다. 이영산 작가 강연을 듣는 순간순간에도 ‘내일인데 내일이야 뭘 그리지’ 번민으로 괴로웠다. 진정 쓰디쓴 욕심을 내려놓고 달콤한 포기의 사탕을 물 시간이 되었다. 지연톰이 제시한 미션 수행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3개를 그리기에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무거나 그려도 된다는 결정은 스트레스를 날려주었다.     

 

핸드폰 갤러리를 열어서 가장 쉽게 따라 그릴 수 있는 사진을 찾았다. 바로 연필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손바닥만 한 드로잉북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스케치북으로 변신하는 시간이었다. 한 땀 한 땀 장인정신으로 시간과 정성을 들이기에 촉박한 마감 앞에 한 획 한 획 신중해졌다. 물감으로 메인을 채우고 배경은 대충 색연필로 뭉개버렸다. 됐다. 하나 완성. 이제 그림에 맞는 글쓰기에 들어가야 했다. 이때부터 사기꾼의 기질이 필요하다. 끼워 맞추기, 갖다 넣기, 무의미한 것들을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의 작업시간이었다. 이런 말로 누군가를 설득했으면 감옥에 갈지도 모를 테지만, 다행히 글로 여섯의 쌤과 하나의 톰만 이해시키면 되었다.    

 

유투브를 보고 따라 그리기.  두 번의 연습 후 숙제노트에 보라색으로 도전. 연습을 왜 했. 실력은 금방 향상되지 않음.


두 번째, 세 번째도 일기도 그렇게 작업했다. 늦은 10시 30분. 다행히 아직 목요일이었다. 이번 주에는 다른 쌤들도 바쁜 일정으로 숙제가 늦어진 게 더욱 큰 위안이었다. 실력도 바닥인데 제출도 꼴찌라면 자신감은 또 바닥으로 바닥으로 한없이 내려갔을 것이다. 잘하는 이들이야 일등이던 꼴찌던 딱 실력으로 보여주면 되니 참 부러웠다. 10시 38분 숙제를 올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금요일 이른 10시 30분 모임이 시작되었다. 각자 그려온 그림을 보여주며 설명과 생각을 나눴다. 초반에 병결로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던 나는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이름과 얼굴들이 이제야 매치가 되었고, 그림과 얼굴들도 연결이 되었다. 조금 편해졌고 친해졌고 따뜻해졌다. 자신의 그림에 진심으로 겸손했고 칭찬에 기뻐했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스트레스와 압박과 좌절감으로 힘들었던 일주일이 치유되는 시간이었다. ‘지연톰의 목적이 이거였구나’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처음 에세이 쓰기 모임에서 느꼈던 흥분도 재미도 좌절도 공감도 기쁨도 사실 좀 희미해졌다. 익숙해짐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마음가짐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림일기를 하면서 순서는 좀 다르지만 다시 느끼게 되는 이 감정들이 너무 좋았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글도 그림도 함께 나누는 이가 있다는 건, 실력을 떠나 행복이 아닐까. 그래서 계속해서 책을 내는 작가들에게 그 일들은 생계가 아닌 생명인 것은 아닐까. 초보도 숙련자도그 시간속에서는 같은 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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