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소설가 김탁환, 농부과학자 이동현과의 북토크를 다녀와서
미실란(美實蘭)
저 고대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제국이나 숨겨진 문명의 발상지일지도 모를 신비스럽고 이국적인 이름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희망의 열매를 꽃피우는 곳이라는 의미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에세이집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를 쓴 김탁환 작가를 1년 만에 한길문고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엔 혼자가 아닌 농부 과학자 이동현 박사와 함께였다. 마음에서 우러난 손뼉을 계속 칠 수밖에 없었던, 진심을 말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오랜만의 진짜 이야기를 듣고 온 가을밤이었다.
김탁환 작가는 2018년 3월 우연히 들린 '밥 cafe飯(반)하다'에서 이동현 대표를 만났다고 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 대표의 철학을 담은 책까지 쓰게 되었다니, 어떤 궁금증이 계속 일었을까 빨리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오랜 시간 한 가지 분야에서 몸으로 일을 해온 사람들은 어떤 경지에 오른다고 했다. 배움의 길이와 상관없이 맹자나 공자나 칸트처럼 깊이 있는 사고,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게 된다. 1996년부터 23년간 쉬지 않고 이야기를 써 온 김탁환 작가도 그런 면에서는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다. 15년간 사라지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온 이동현 대표를 딱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경지라고나 할까.
이동현 대표는 지방 소멸, 농촌 소멸, 벼농사 소멸, 공동체 소멸의 시대에 맞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인구 소멸 예정지구인 전남 곡성에 터를 잡았다. 서울과 비슷한 면적에 2만 8천여 명이 사는 곡성은 거리두기가 최우선인 코로나 시대에 가장 살기 좋은 동네라고 이 대표는 웃으며 말했다. 미생물을 연구했지만, 소멸에 맞서 벼농사에 뛰어든 그를 이웃들도 학자들도 모두 미친놈이라고 했다.
그 미친놈의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보아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좋은 글을 쓰려면 몸을 써서 자기의 감각으로 세상을 만나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뇌로만 글을 쓰고 있다며 김탁환 작가는 말했다. 15년간 몸을 쉬지 않고 놀린 덕분에 이 대표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 어떤 명강사, 명작가의 강연보다 감동적이었다.
'선순환의 철학'을 오롯이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21세기 실학자가 이대표라고 김 작가는 표현했다. 화학비료와 제초제와 비료를 쓰지 않는 땅에서 자란 벼는 뿌리가 깊다. 농부가 끼니마다 부어주는 비료에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니 땅속 깊이 뿌리를 박아 생명력을 기른다. 깊게 들어가다 또 양분이 적으면 옆으로 뻗어 나간다. 흙 속에서 벼는 그렇게 뿌리들이 얽히고설켜 연대하게 되니 그 어떤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게 된다. 건강하게 자란, 스스로 시련을 이겨낸 그 쌀을 먹는 이들은 우주의 모든 에너지를 다 받게 될 것 같았다.
문득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벼농사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좋은 생각은 전염되는 건지, 김 작가와 이 대표 또한 농사와 육아는 동일하다고 말했다. 날 때부터 거의 반평생을 경쟁해야 하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경쟁에서 뒤 처지만 갈 곳을 잃어버리는 대도시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손으로 하나하나 모내기를 하게 되면 이양기로 할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의 모를 원하는 만큼 심을 수 있다. 심어지는 순간부터 옆에 함께 자라는 동료들을 제치고 살아남아야 하는 기계 농법과 달리 벼들은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으며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된다. 시작부터 경쟁이 아닌 자연스럽고 독립적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자그마한 도움만 주고 지켜보는 게 부모의 역할이지 않겠느냐고 이 대표는 말했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크고 작은 난관들을 극복할 힘은 좌절과 실패의 경험일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겪게 될 실패의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성인이 된 아이들은 최소한 다시 일어설 힘을 가지게 된다. 시기마다 필요한 것들을 재깍 재깍 제공해주고 비바람을 막아주고 더럽고 힘든 것들을 멀리하게 해주는 것은 나쁜 부모임이 틀림없다. 병충해를 이겨내고 자연재해를 온몸으로 막아낸 벼들에서 얻은 쌀로 지은 밥상을 차려내는 것만 해줘도 우리 아이들은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맛이 없을지 몰라도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 한 끼의 추억이 있다면 매서운 방황 속에서도 아이들은 다시 그리운 엄마 품을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가족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야 할 이유이며, 건강한 밥상의 힘이라고 이 대표는 말했다. 나는 요리에 소질도 없고 흥미도 없는 주부라 그동안 밥상을 소홀히 했다. 맛없는 엄마의 음식보다 맛있는 외식이 낫고, 다양한 반찬가게의 제품들이 경제적이라고 생각했다. 지방 소멸, 농촌 소멸, 벼농사 소멸, 공동체 소멸의 위기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실천은 아이들, 가족을 위한 밥상 차리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