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첫 회기를 준비하는 셀프 질문 몇 가지
상담심리사 1급. 16회기. 128만원. 내 인생 첫 심리상담 뒤에 남은 숫자다. 2021년 초 겨울이 끝날 무렵, 새해 다짐으로 병을 치료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서도 여전히 내 병의 중함을 부정하던 나는 정신과 진료실에서 이런 질문을 하기에 이른다.
선생님, 저 중증도 아닌 것 같고 약도 그다지 소용이 없는 것 같은데... 약물치료 보다도 운동이나 식이나 뭐 그런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의사 선생님은 '저 사람이 지금 우울 삽화가 분명한데 왜 저러나' 생각했을 수 있지만, 친절하게 답했다: "경제적 여력만 된다면 상담을 쭉 받을 수 있으면 좋죠. 약물이랑 병행할 때 가장 효과가 좋아요. 약은 아직 두 개 밖에 먹어 보지 않았잖아요. 보통 여러 개 바꿔봐야 맞는 약을 찾을 수 있어요."
나는 여전히 약물 치료에 관한 의구심을 안은 채 상담심리협회 웹사이트에 들어갔다. 꼭 이 자격증이 있어야만 상담을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난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꼭 상담심리1급 자격이 있는 사람을 만날 작정이었다. 직장 근처의 심리상담사 중 이름과 전문분야가 마음에 드는 두 사람을 골라 문의 전화를 걸었다. 첫 회기를 잡고 갔더니 두 상담사는 상당히 비슷한 이야기를 물어봤다. 어떤 부분을 상담에서 다루고 싶은지, 인생사는 어땠는지, 이전에 상담을 받은 적 있는지, 지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지, 진단명이 있는지, 상담사에게 어떤 점을 기대하는지,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필 지금 찾아오기로 결심했는지.
상담에서 어떤 점을 기대하나요?
특히 두 상담자 모두 '상담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지, 어떤 점을 기대하는지'를 열심히 물어봤다. 어떤 걸 다루고 싶냐니? 내 인생? 나 자신? 나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상담에서 무엇을 기대하냐는 말에도 답하기 어려웠다.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 거예요?'라고 물어봤어야 할까. 나는 최선을 다해 답했는데, 듣는 상담사 입장에서는 약간 피상적인 답변이었을 것 같다. "다른 시각을 제시해 주고, 대체로 절망으로 치닫는 저의 논리에서 비약을 발견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땐 이 정도면 충분한 답이 됐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모든 인간 관계에는 기대가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사람과 친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 모두 은연 중에 어떠한 기대를 품는다. 이 사람과는 여기까지 친해질 수 있겠다, 이 사람은 직장 동료니까 일주일에 두 번정도 점심 같이 먹으면서 사적인 이야기를 너무 깊지 않은 정도로 하고 직장 고충을 적당히 나누는 사이가 되면 좋겠다- 매주 금요일에 술 한잔 같이 할 것 같은 느낌인데? 같은 생각을 대강 품게 된다. 자기가 어떤 기대를 품었는지 모르다가 나중에 상대방이 나보다 많은 걸 기대했거나 적은 걸 기대했다는 걸 발견해야 비로소 내 마음을 깨닫기도 한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에서도 그런 기대가 생기게 된다. 다른 관계는 애매하게 시작되지만, 상담 관계는 그 특성상 앞으로 다가올 관계에 어떠한 기대를 갖고 있는지 먼저 논의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남에게 뭘 기대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16회기가 끝나고 깨달았다). 내가 어떤 것을 기대해도 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도 잘 모른다. 원하는 것이 있어도 스스로의 감정에 확신이 없어서 애써 '난 인간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어-' 하고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 같다. 상담사는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니까 지지해 주기를 바랐고, 나의 인지적 오류를 바로 잡아 주기를 바라는 게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그 정도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16회기 상담이 끝나기 약 6일 전에 내게 엄청난 깨달음이 몰려왔다. 내가 상담자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나를 진심으로 대해 주길, 내가 불안해 하는 것을 감지하고 반응해 주길, 분명한 구조를 잡아 주길, 내 말을 잘 이해해 주길, 내가 선을 넘어가거나 선 주변에서 혼란스러워할 때 때 전문가 다운 능숙함으로 선을 명확하게 그어 주길, 그러니까 이 관계를 매끄럽게 리드해 주길 바랐던 거다.
나의 회피성향 때문에 관계를 맺을 때는 생각도 못하다가, 관계가 끝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객관적이고 솔직하게 마음을 감지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얼만큼 구체적이어졌는지 자랑(?)하자면 이렇다.
BEFORE (1회기 전)
다른 시각을 제시해 주고, 대체로 절망으로 치닫는 저의 논리에서 비약을 발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AFTER (15회기 후)
1. 저는 나만의 길을 개척하고 싶지만 거절과 불안감이 두려워서 자꾸만 포기해요. 제가 포기하지 않고 두려움을 담담히 헤쳐나도록 장려하고, 제가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도록 지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2. 저에게 지지란 무조건적인 감정적 공감이 아니라, 제가 두려워 하는 일들에 관해 함께 대책을 세워 주는 거예요. 제가 더 완고한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목표에 맞게 같이 과제를 생각해서 실천 여부를 체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3. 저의 강점을 발견해 주세요. 저는 저의 좋은 점을 잘 보지 못해요. 서서히 제가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게 되도록 시범(?)을 보여 주시면 좋겠어요.
4. 저는 구조가 있는 관계에 편안함을 느껴요. 상담 초기에는 구체적으로 우리 둘의 약속, 해도 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 이 관계의 역학이 어떤 것인지, 목표는 무엇이고, 그에 다가가기 위해 목표를 각 회기마다 어떻게 설정할지 등 상담의 체계와 구조를 잡는 데에 시간을 쓰기를 원해요.
이렇게 말하면 상담자도 자신의 성향이나 역량을 돌아 보고 나와 잘 맞을지 생각하기 쉬울 것이고, 내가 상담에서 더 만족스러운 경험을 할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첫 회기를 준비하는 마당에 이렇게까지 생각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이게 16회기동안의 성과라고 생각하지, 이렇게 했어야 16회기가 의미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원래 15회기 즈음에 이런 리뷰가 생기곤 한다고 상담 선생님도 이야기하셨다.
그럼 내가 뭘 기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상담하는 척,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해 보면 도움이 된다. 나는 몇 회기 쯤 지나고, '상담이 잘 되고 있나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상담사 답게 "상담이 잘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요?"라고 되물었다. 바로 이 기법을 스스로 이용해 보면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첫 상담 때 내가 들었던 질문과 내 답, 그리고 그에 대한 구체화 질문을 적어보았다. 나는 상담 스킬이 없어서 구체화 질문이 조금 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 답을 써보고, 구체화하는 질문을 해보고, 그에 대한 답을 또 해보고, 그 답에 관한 질문을 또 해보고... 아무튼 그만하고 싶어질 때까지 한 번 해 보면 첫 회기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상담자나 치료자는 지지해 줄 뿐, 자신을 낫게 만드는 일의 PM이자 결정권자이자 실무자는 다 나이고, 내가 가장 많이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는 걸 나는 상담을 받으면서 더욱 많이 깨달았다.
새로운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직시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끝나고 돌아 보니 더 용기를 내 볼걸, 후회되는 순간들이 있다. 모두의 첫 회기 화이팅. 심리상담 건강보험 적용되게 해 주세요.
첫 상담 가기 전에 자신의 기대를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 보기
1. 왜 지금 상담을 받으러 왔나요? 어떤 계기가 있나요?
(항상 상담을 받고 싶었는데, 늘 돈이 없었어요. 이제 돈이 조금 생겨서 왔어요.)
1a. 왜 상담을 계속 받고 싶다고 생각했나요?
2b. 이전에도 절약을 하거나 저축을 해서 올 수 있는 상황은 없었나요? 있었다면 이번에는 뭐가 특별히 다른가요?
2. 어떤 점을 기대하나요?
(다른 시각을 제시해 주고, 대체로 절망으로 치닫는 저의 논리에서 비약을 발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2a.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것의 예시가 있을까요?
2b. 논리적인 비약을 발견해 주는 대화는 어떤 모습일까요?
2c. '절망'은 논리일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해당 되는 단어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가 있나요?
2d. 상담이 진행되는 과정이나, 형식에 관한 기대가 있나요?
2e. 상담사와의 친밀감은 어느정도 수준일 것이라고 예상/기대하나요?
3. 어떤 문제를 다뤄보면 좋을까요?
(뭐라 짚을 수가 없어요. 저의 인생이요.)
3a. 최근에 가장 신경쓰이는 문제가 있나요?
3b.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제가 있나요?
3c. 시간이 꽤나 지났지만 잊히지 않는 일이 있나요?
3d. 생각은 많이 해보았지만 남에게 말하지는 못한 문제가 있나요?
3e. 가장 견디기 힘들거나 참을 수 없는 문제, 하루라도 빨리 없애거나 고치고 싶은 것이 있나요?
3f. 내가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떤 모습일까요? 그 삶과 현재의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4. 상담 과정에서 걱정이 되는 부분이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나요?
(저는 사람들이 저를 안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저의 어려움이나 생각을 얼버무려서 급 마무리 짓곤 해요. 감정 표현이 조금 불편해요.)
4a. 상담관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한번 해볼까요?
4b. 상담관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상담자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생각이 많아서 인생 살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글이라도 많이 쓰려고요. 누구나 생각에 시간을 쏟아붓지는 않기 때문에, 저의 결과물들이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깨달음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을 흥미롭게 보셨다면 구독하고 종종 읽어 주세요.
선율 / 트위터, sunyoo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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