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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마치 Mar 23. 2022

고요라는 보물

제주 여행에서



적막에 중독됐나 보다.

언젠가부터 여행을 가면 호텔보다는 작은 정원이 있는 독채 펜션이나 에어비앤비를 찾게 된다.  2년 전 여름 우연히 가게 된 강원도 평창의 한 숙소. 테라스가 있길래 무심코 앉았는데 너무나 오랜만에, 낯설 정도의 고요함을 느꼈다.

그 기분을 맛본 이후부터 자꾸 읍내와 떨어진 조용한 동네를 찾는다.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 나온 듯 바람 소리, 새 소리만 들려오고 도시 소음과 사람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는 때. 마치 비바람을 맞다 실내로 문을 '탁' 닫고 들어온 것처럼 온갖 잡음으로 시끄럽던 머릿속이 한순간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머리를  비우고 싶어질 때란 생각보다 많았고, 최근 몇 차례의 여행에선 외진 곳에 위치한 숙소를 골랐다.





이곳 제주도에서의 숙소도 마찬가지다. 서귀포시의 조용한 집에서 차 한잔 마시면서 멍 때리기. 상쾌한 아침 공기 사이로 들리는 소리라고는 새들의 지저귐 뿐이다.


퇴사를 하고 새로운 시작에 앞서 불안을 잠재우고 환기를 시키고자 온 여행이다. 여행 가기 전 관광지와 맛집을 찾아보며 잔뜩 계획을 세우지만 이번 여행에선 패스. 사실 계획 짜는 게 귀찮기도 했다. 어쨌든 제주에 왔고, 바람 쐬며 의자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이곳에 와서 머릿속을 정리하며 미래를 위한 일련의 구상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역시 그만두었다. 여기선 그저 비우고, 버리고, 덜어내면서 떠나야만 얻을 수 있는 이 고요함과 적막을 오롯이 즐겨보기로 한다.

계획, 실천, 도전 이런 건 복작복작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잘 되는 것 같기도. 그리고 어차피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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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거 좋아하고,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성질을 타고났으면서도 일을 안 하면 금세 불안함이 도지는 것도 타고난 기질이다. 이곳에서 만큼은 모순 덩어리인 마음을 내려놓고  누군가의 말처럼 '내 운명이 이렇게 흐지부지 끝날 리 없다'라고 믿어보면서,  포기가 아닌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위해 마음껏 비우고 가야겠다.






다행히도 늘 한결같은 절친이 나의 여행길에 동행해주었고, 날씨 운도 따라주어 지금은 바다 색이 예쁘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귤나무도 무럭무럭 자라는 곳이다.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고, 모든 게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돌아가는 곳. 제주의 공기가 주는 생기와 에너지를 듬뿍 받으면 나도 꽃피울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까지 들게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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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선 시간이 느리게 간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조식을 먹고, 테라스에 앉아 친구와 한참을 떠들다가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 지도 꽤 됐다. 하지만 아직 12시 15분. 서울이었다면, 평소처럼 회사에 있었다면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도록 끝나지 않는 오전 업무에 빵 쪼가리나 입에 쑤셔 넣고 있을 시간이다. 너무 짧게만 느껴졌던 그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생각과 일을 할 수 있다니. 여행이 소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같은 시간을 똑같지 않게 보낼 수 있다는 점.


내가 그토록 찾던 평화로움 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나머지 일은 될 대로 대라 싶다. 이 맛에 자꾸만 고요한 공간을 찾나 보다. 정오를 지난 햇살은 아직 포근하고, 여전히 바람 소리가 유일한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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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3

by. @yoo_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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