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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마치 Apr 19. 2022

그녀는 사랑, 충격, 웃음

영화 <스펜서>







한꺼번에 밀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마치 지금 이 스토리를 반드시 알고 지나가야 한다는 듯이 책과 영화, 인터넷 등 매체를 불문하고 불현듯 이야기가 내 앞에 놓인다.


최근 내겐 영국 왕실의 이야기가 그랬다. 예전부터 넷플릭스에 찜해뒀던 드라마 <더 크라운>을 보기 시작했을 무렵,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연기한 영화 <스펜서>가 개봉했다. 왕실 이야기를 보고 있으니 주도면밀한 알고리즘은 영국 왕가를 다룬 다큐멘터리 <윈저 성 이야기>를 보라고 추천했다. 심지어 구독 중인 어느 유튜버는 80~90년대의 패션에 대해 소개하며 다이애나비의 센스 있는 옷차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큰 관심 없던 영국 왕실의 역사와 인물들에 대해 자의 반 타의 반, 픽션 논픽션을 넘나들며 지식을 쌓게 되는 건 꽤나 흥미로웠다. 그중에서 가장 여운이 오래가는 건 영화 <스펜서>. 감정적으로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이기 때문 인 것 같다. 다큐멘터리 등에선 찰스만큼이나 다이애나도 '사고뭉치'적인 면모를 다분히 갖고 있었다는 듯 설명했다. 하지만 다이애나 입장에서의 고통과 내면이 드러난 <스펜서>를 본 이후엔 다이애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남의 나라 왕세자를 이렇게 욕해도 될까 싶을 만큼 이제 내게 찰스는 그저 난봉꾼에 불과하다.






"이름은요?"
 "스펜서"

 

 이렇게까지 다이애나에 공감하게 된 이유의 8할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가 차지한다. 그는 <스펜서>로 '인생 연기를 펼쳤다'라는 극찬을 받으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랐다. 남편 찰스 왕세자는 외도를 일삼고, 왕실 가족들은 이를 외면한 채 전통과 법도만 중시한다. 새장에 갇혀 자유를 갈망하는 어린 새 다이애나는 나날이 병들어 간다. 크리스틴은 이런 고통을 눈빛과 표정과 몸짓으로 섬세하게 표현한다. 특히 신경 하나하나가 곤두선 듯한 얼굴에 나까지 숨이 막혀왔다. 커다란 스크린으로 얼굴이 클로즈업된 장면을 많이 보여주니 눈빛이 상대적으로 '섬세하다'라고 느꼈을 수도 있지만 관객 입장에서 극 중 인물과 동일시되며 답답함을 느꼈으니 배우로서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 셈이다. 보는 이가 한숨이 나올 정도인데, 당사자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 그 삶이 얼마나 싫었을지.


거식증과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 다이애나만 내내 나오는 영화에서 숨통이 트이는 장면은 그가 자유롭게 행동할 때다(때때로 영문 모를 눈물이 터지기도  당황스러웠다).     아들과 몰래 촛불을 켜놓고 진실 게임을  , 어린 시절 자신을 보며 춤을 추는 모습, 허수아비의 옷을 벗기고, 사냥터에 맨몸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시원스레 노래하며 운전을  . 그게  영화가 보여주고 싶어  다이애나의 진짜 면모인 듯하다.


극 중 다이애나는 훗날 자신이 어떤 말로 기록될지 궁금해한다. 역사가 오래 지날수록 그 사람을 정의하는 문장이 짧아진다는 말과 함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신하인 매기에게 이런 근심을 토로하고 있을 때 매기는 현명한 답을 내놓는다.



전하는 치료가 아니라 사랑이 필요해요.

사랑, 충격, 웃음.

아주 많이요.






 

사람이 한 사람의 온전한 세계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가족도, 심지어는 스스로조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물이 사람이다. 평생 곁에 있던 사람일지라도 결코 100%는 모를 거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다이애나를 그저 '비극적인 운명 속에서 요절한 왕세자비'라고만 기억했을 것이다. 그가 사실 왕실의 트러블 메이커였건, 숨 막히고 가슴 찢어지는 쓸쓸함에 말라죽어가던 여인이었건 주변에서 아무리 설명해 봐야 우리는 그녀에 대해 오롯이 알지 못한다. 연민과 조금의 공감, 동정심을 가질 수 있을 뿐.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도 왕실의 법도를 따라야만 한 적도, 커튼을 꼬매버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파파라치에 시달려 본 적도, 그 외 그녀가 겪은 모든 일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짧디 짧은 시간 그녀의 인생  조각을 엿본 결과, 다이애나는 '사랑, 충격, 웃음'  자체였고 누구보다 이를 필요로 했던 사람이었음은 안다.







-

SPE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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