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관조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 Nov 04. 2023

11월 3일. 악보처럼

여섯 번째 일기

집에서 피아노를 치다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거의 다 왔다. 너 잘하고 있잖아. 이 곡도 완곡할 수 있어.'



일기를 올리지 않고 시간이 꽤 흘렀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적기 귀찮아서 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 관조 일기를 계속 읽고 계신 분이 있었다면 미안하지만 고작 이 이유가 전부다.


그래도 변명해 보자면 관조  일기는 내가 우울하고 우중충한 마음 가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기 시작했다. 이 것은 첫 번째 일기에서 명확히 밝히기도 했는데, 그때는 정말 어떤 글이라도 써서 이 우울함을 표출하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고작 몇 번의 일기만에 '아 굳이 출근 시간에 이렇게 머리 아프게 글 쓰고 싶지 않은데.'라고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며 깨달았다. 위험한 우울의 단계는 그 몇 번의 글로 벗어났다는 것을 말이다. 일기는 그렇게, 그래서 멈추게 되었다.


관조 일기를 시작하던 때와 일기를 쓰지 않은 후의 내 삶을 비교하면 지금이 더 최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당시 잘 다니던 회사는 갑자기 쫄딱 망해서 나를 내쫓았다. 투자로 운영되는 회사였는데 새로운 투자자를 찾다가 실패했다며 직원을 1/10도 남기지 않고 모두 쫓아냈다. 물론 나는 그 1에 속하지 않았다.

골머리를 앓게 하던 가족관계는 더욱 안 좋아졌다. 심지어 최근에는 친척 결혼식에 갔다 왔는데, 나와 싸운 가족들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조카의 결혼식인데 말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 할머니는 눈에 띄게 야위었다. 위에서 말한 결혼식에 가고 싶다 하셔서 내가 모시고 갔는데 팔을 부축해 드릴 때마다 울음을 쏟을 뻔했다. 예전에는 살찌셨다고 우스겠소리를 했으나 지금은 정말. 문자 그대로 뼈만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나는 회사에서 쫓겨난 고독하고 슬픈 백수인 상태다. 심지어 어제부터 재취업 준비를 위해 포트폴리오를 만드려 했으나, 갑자기 컴퓨터가 고장 나 이 일기도 핸드폰으로 적고 있다. 아! 불쌍한 내 인생...


그럼에도 신기한 점은 내가 첫 번째 관조 일기를 쓸 때보다 우울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팀원이 인정해 주는 회사 생활, 야식으로 4만 원을 태워도 걱정이 없었고, 통장에 모인 돈들은 남들과 비교해도 꽤 우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깊은 바다로 한 없이 잠수하는 중이었다. 자기반성과 자아성찰이라는 허울로 가득 찬 바다는 나를 우울의 늪으로 유혹하고 있었고 나는 저항할 생각도 않고 아주 깊게 침잠할 뿐이었다.


당시에 나름 그곳에서 올라와 보겠다고 별 짓을 다했다. 친구의 조언대로 낯선 사람들의 모임에 끼어 에너지를 쏟기도 하고, 뜬금없이 피아노를 독학하기 시작했으며, 헬스를 시작한 것도 그런 행위의 일종이었다. 그 밖에도 난 원래 나라면 하지 않을 짓들을 정말 많이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 행동은 꽤나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나는 바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좀 더 세밀하게 말하면 그 바다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모두가 곁에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발 정도는 담그고 있으며 얼마나 잠길지는 항상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힐난하고 비웃을 때마다 깊게 잠겨간다. 바다가 올라오는 원동력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을 모자란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 놈의 원동력이었다.


뜬금없는 비유를 해보자면, 피아노 교재 첫 장은 너무나도 쉬운 악보로 가득 차 있다.

흔히 아는 떴다 떴다 비행기부터 도레미만 사용하는 악보들 말이다. 아이라면 상관없으나, 성인들이라면 으레 '에이,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 정도 레벨은 아니지~' 하고 넘어간다. 그리고 마주한 책 중반부에서 좌절을 겪게 된다. 내 이야기가 맞다. 바보 같은 어른이 그 자체다.


이때 다시 초반부로 돌아와 그 흔히 아는 쉬운 노래를 치면 그제야 쉬운 노래도 생각보다 쉽지 않구나를 느낀다. 그리고 한 악보를 끝냈을 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녀석에게서 왠지 모를 뿌듯함을 받게 된다.


내겐 침잠하던 시기가 책의 중반부를 펼쳐보는 모습과 다름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했고 펼쳐본 그 시간들은 자기혐오로 가득 찼었다. 교재 첫 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정해 바다에서 허우적거렸다.

허우적거림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소소한 성공이 반복되자 나는 점차 떠오르고 있었다. 피아노 교재 초반부의 완곡 경험들, 점점 올라가는 3대 중량. 그런 소소한 경험들이 나에 대한 욕심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들은 공기주머니와 같아서 나를 바다 위로 끌어올렸고 어느새 나는 발만 담그고 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우울하지 않았다.


삶은 꼭 악보를 따라 완곡하는 것과 같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오선지에 내 마음먹기에 따라 마디가 정해지고 세로줄이 그어진다.

하나의 세로줄에 닿기 위해서는 음표를 정해진 박자만큼 넣도록 노력해야 하고, 이 음표는 정해진 박자의 수만큼만 넣어야 한다. 노력이 과분하면 그 마디는 실패한 마디가 되어 나를 괴롭힌다.

또 많은 박자의 음표를 사용했다면 때때로 쉼표를 통해 쉬어가야 한다. 쉼표들은 마디를 이루는 훌륭한 수단인데,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잊는다.


그렇게 완성한 마디들을 우리는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무작정, 다음에는 한 줄씩 띄엄띄엄, 그다음에는 끝 세로줄까지. 마지막으로 한 번에 제대로 완곡할 때까지 반복하며 연주한다. 인생도 그렇다. 언제나 한 번에 목표는 갈 수 없고 우리는 그저 돌아갔다가 나아감을 반복해야 한다. 그래야 끝 세로줄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에는 어떤 편법도 없으니 사람들은 돌아갈 때마다 바다에 잠기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아쉽게도 인생이라는 곡의 악보 속 끝 세로 줄은 알 수 없다. 곡이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참으로 특이한 악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나 온 끝 새로 줄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곡과 같다. 때문에 우리는 바다에 잠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말해주어야만 한다.

'거의 다 왔다. 너 잘하고 있잖아. 이 곡도 완곡할 수 있어.'



매거진의 이전글 7월 26일. 불안과 버팀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