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발 3,777미터 후지산을 오르는 중이다.
“뭐 좀 독특한 거없나”
시작은 평범한 여행과 같았다. 어릴 때부터 일본에 거주하는 부모님 덕분에 숙박비와 식비, 그리고 덤으로 용돈까지 받는 특혜를 누리며 여행 할 수 있는 일본은 익숙했다. 바쁜 사람들과 거미줄 같은 전철, 마천루와 번화가가 즐비한 도쿄는 그저 언어만 일본어로 바뀐 재미없는 서울이었고, 다른 도시들도 비슷했다. 마냥 재밌고, 흥미롭고, 특별한 경험을 찾아내는 것은 타들어 가는 사막에서 단비를 기대하는 것과 같았다. 기우제를 지내듯, 멕북에어를 열고 사파리를 실행하고 무한에 가까운 구글의 목차를 탐험하던 중 발견한 문구들
‘한라산의 두 배! 해발 3,777m 후지산 등반!’
‘발아래 구름이 있는 경험’
‘익숙한 일본에서 잊지 못할 추억!’
‘후지산에 올라 멋진 일출을 보다’
동네 뒷산은 커녕, 계단 오르는 것도 싫어서 엘리베이터를 찾았던 나란 존재는 ‘구름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산소가 부족하니 산소통을 준비하라’ 같은 비현실적이고 모험적인 문구에 현혹되어 홀린 듯이 버스표를 예약하고, 근처 돈키호테에서 헤드렌턴과 소형산소통을 샀다.
「ここは六合目」
여기는 육합목
30분이 지났을까?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구름이 나와 나란히 부유한다. 후지산은 높이에 따라 10개(十合目)로 구분을 하고 버스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오합목(五合目)에 내려 산을 오른다. 지대가 워낙 높아 늦여름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후지산은 7월, 8월에만 등산을 허락한다. 밤 10시, 버스에서 내리니 자정이 되기 2시간 전이다. 보자마자 떠난 여행이었기에 산장에서 쉴 수 있는 선착순 휴식의 예약 따위는 불가했다. 눈을 붙일 시간이 없으니, 밤에 걸어 아침에 도착하는 것이다. 깜깜한 밤인데도 불구하고 구름은 나의 등반을 고요히 지켜봤다. 그 우아한 움직임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멈춘 듯했다.
거대한 산 정상에 올라가는 등산로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 치열하게 길을 뚫고 나아가야 했던 과거 전성기 명동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르르 몰려있는 등산로 입구 주변으로 작은 상점들이 즐비하다. 앞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너나없이 나무로 된 지팡이를 사가니 으레 나도 하나 샀다. 마치 산악인이 된 느낌이다.
「ここは七合目」
여기는 칠합목
춥다. 한여름인데 늦가을 같다. 떠날 때 엄마가 보온병에 챙겨준 따뜻한 믹스커피를 마시면서 몸을 좀 녹였다. 올라오는 길에 한 커플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화려한 등산복이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사실 한국말로 싸우긴 했다. 잠깐 숨 좀 돌릴 겸 싸우는 것을 들어보니 여자가 남자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요약하자면 짧게 온 여행인데 이곳이 이렇게 힘든 곳인지 몰랐으며, 너무 힘들어서 나머지 여행을 망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남자는 특별한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힘들어 할지 몰랐다며, 누가봐도 우리 싸운다는 홍대거리 커플과 똑같은 자세로 후지산에 서 나란히 서 있었다. 그렇다, 힘들다. 지친 몸은 각 세밀한 감각으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체감하게 해주었다. 힘듦을 넘어 느린 시간의 흐름까지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길은 하나, 선택은 두 개였다. 계속 올라가는 것과 여기서 내려가는 것. 두 시간 반쯤 걸은 것 같다. 어느새 나무는 없고 듬성듬성 풀이 나있다. 구름과 한 발짝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八合目」
팔합목
이제 구름과 같이 있다. 겉보기에 낭만적인 구름의 내부는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세상의 심술을 모아놓은 보따리처럼 비가 내리다, 진눈깨비가 내리다,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비가 내린다. 추운 건 또 얼마나 추운지 바지를 두 개나 껴입고 패딩을 입어도 추위는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바람은 말할 것도 없다.
날씨가 변덕스러운데도 잠은 얼마나 고집을 부리는지 변덕스러운 구름 안에서 우비를 이불 삼아 얼굴까지 덮고 걸리적거리는 지팡이도 옆으로 내팽겨 두고 흙바닥 위에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어린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 깼다. 다 쓰러져가는 나와 대조되는 아이들의 즐거움은 다른 세상에 와있는 듯 신비로운 존재처럼 보이며 묘한 감정을 불렀다. 동시에 빗방울을 강렬한 소리를 내며 그들의 웃음에 더욱 생동감을 주었다. 부수수하게 일어난 나의 뒷덜미는 진흙으로 진창이 되었다.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듯 빗방울들이 살랑살랑 내려와 얼굴과 뒷덜미를 금방 씻겼다. 지나간 아이들처럼 나또한 활기를 찾았다.
다시 산을 올랐다. 아까 기념품으로 산 나무지팡이가 드디어 쓸모가 생겼다. 나무지팡이를 딛고 다시 일어섰다. 긴 지팡이는 올라오는 내내 얼마나 거추장스러웠는지 “집에 갈 때 살걸”을 수없이 되뇌며 후회했지만, 이 지팡이는 마치 나를 일으켜 주는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
“カメラに気をつけてください”
카메라 조심하세요
지나가는 일본인 등산객이 매고 있던 DSLR카메라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름 속에 완전히 들어왔는지 습기 반, 공기 반으로 가득한 이곳은 비가 내리는 것을 넘어 존재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이제 한치의 앞만 보일 정도의 짙은 안개가 가득했다. 어느 정도의 높이까지 왔는지 가늠할 수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은 위로 향해있는 내 앞에 등산로와 그 등산로를 따라 일렬로 줄을 서서 따라가는 우비군중의 모습이다. 앞으로 갈수록 그 모습은 안개로 흐려져 하늘과 땅을 잇는 문처럼 보였고, 올라가는 사람들은 마치 하늘나라 관문으로 천천히 사라져갔다.
구토하는 사람을 보았다. 산소가 부족하여 일어나는 고산병의 흔한 증상이라고 했다. 팔합목(八合目)을 넘어선 순간 한 사람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외길이 시작된다. 이제 되돌아가고 싶어도 되돌아 갈 수 없다. 중간에 되돌아 갈 수 있는 하산길이 나올 때까지 계속 올라야 했다. 이 외길은 가혹하게도 내가 올라가지 않으면 내 뒤에 사람이 올라갈 수가 없다. 올라가야 한다.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마 산소가 부족한 탓일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후지산 정상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아직 녹지 않은 약간의 눈과 검은 화산재가 있다. 그러고보니 그 어떤 식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약 10시간, 그러니까 아침 8시가 되어서야 정상을 밟았다. 일출은커녕 올라오는 중에 하늘이 밝았다. 짙은 안개와 비는 정상에서도 여전했다. 정상의 시간은 잠깐이라고 10시간을 올라온 정상에서는 1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만 머물고 하산을 결정했다.
“끝까지 올라온 원천은 뭘까? 기대? 오기? 생각 없이 사람들에 떠밀려서? 아님 아이들이 올라가는 모습에?”
하산길에 발을 디딘 순간, 정상에서 경이로운 풍경이 아쉬움으로 남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 중간에 포기하지 않은 이유를 되새기며 나에게 한 걸음씩 내딛은 이유를 물어보았다. 나이가 들 듯, 지나가는 삶의 여정을 되짚어보는 것과도 같았다. 더 나은 선택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들도 교차하며 하산하고 있었다.
지그재그가 반복되는 하산길은 올라가는 것 그 이상의 고됨과 인내의 고행이었다. 주변에 울타리나 나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트랙을 이탈하면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때문에 빠르게 갈 수도 느리게 갈 수도 없었다. 정확한 발딛음과 적절한 속도, 균형을 맞추어 내리막길을 걸어야 한다.
「ここから五合目」
여기서부터 오합목
인생의 험한 산길, 인생의 목표에 올라가는 것은 우아한 바람처럼 흘러가듯 목표를 향해 걷는 것이지만 목표에 도달하고 나서 다시 내려가는 것은 돌풍에 나아가는 것처럼 쉽지않다. 항상 꿈을 쫓고 목표를 위해 계획을 세우지만 그 이후의 대비를 하지않는다. 무탈히 내려가는 것이 결국 인생에 목표에 제대로 도달한 것이구나. 또한 여정에서 동반자로 함게한 지팡이처럼, 어느 곳,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신세를 지는 것이 아닌 공존하고 동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자신과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하산 길은 장장 4시간의 고행이었다. 총 14시간 10분의 산행에서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내게 다가온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이 여정이 가진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게 만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길, 지나간 하루의 기억들이 14시간 동안 동행한 산소통 하나에 담겨 있다. 비닐도 뜯지 않은 채로, 마치 그 순간을 간직하듯. 그대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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