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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글 Nov 05. 2024

가장 행복한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드라마 '조용한 희망' 명대사 다시 읽기


시장통의 먼지는 꽤 맵다. 하루 종일 속옷을 팔다 돌아온 엄마는 그날의 고단을 흘려보내기 위해 세면대 앞에 섰다. 돈을 버는 대신 내 놓아야 했던 자존심과 배고픔을 잊으려 욱여넣던 국수 가락사이에 낀 시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흐르는 물에 코와 목을 씻어냈다. 얼마나 따가운지 킁킁거리는 소리가 계속 났다. 그걸 이해할리 없는 사춘기 소녀에게 밤마다 들리는 그 소리는 몹시 자극적이었다. 나는 귀를 막고 숙제를 하다 와락 짜증을 부리곤 했다. 꼭 그렇게 씻어야 하냐고. 그 때 나는 몰랐다. 엄마가 왜 그렇게 일만 하는지. 왜 집에 오면 깨끗이 자신을 씻어내는지.


집에 와서도 쉴 틈 없이 가족들 저녁식사를 차리고 밀린 집안일을 해야 했던 엄마는 가끔 권위적인 남편의 짜증도 감당해야 했고, 갑자기 들이닥치는 술손님들도 맞이해야 했으며 심통 부리는 시어머니 식사도 챙겨야 했다. 모두가 잠든 밤 주판을 굴리며 장부를 마무리하는 엄마 옆에서 나는 애정을 구하곤 했다. 젖먹이 아기처럼 옆에 꼭 붙어서 조잘대며 엄마의 눈빛을 갈구했지만 에너지가 닳은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듣다 웃으며 그만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가끔 다음날 먹을 콩나물을 같이 다듬기도 했는데, 새벽이면 두루치기에 콩나물 익는 냄새에 눈을 뜨곤 했다,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내는 엄마는 부지런했고, 철인이었다. 엄마의 코 씻는 소리는 나를 위해 뽀얀 엄마로 둔갑하는 소리였다. 철인28호가 엄마로 변신하는 소리였다.  

 

그 시절 우리 엄마만큼이나 단단한 엄마를 드라마 조용한 희망에서 보았다. 직관적이고 차가운 원제는 메이드(MAID)’, 말 그대로 청소부로 산 엄마의 이야기이다. 트레일러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두 살짜리 여자아이를 키우며 사는 20대중반의 알렉스. 술에 취하면 벽에 유리잔을 집어던지는 폭력적인 남자친구를 피해 그녀는 어느 밤 딸을 데리고 무작정 도망친다. 하지만 아직신체적으로 폭행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주는 곳이 없다. 정부의 보조를 받으며 청소업체의 용역으로 일하려 하지만, ‘일을 구하려면 어린이집이 필요하단 걸 증명하려고 일을 잡아야 하는차가운 현실에 부딪친다. 겨우 레지나라는 부잣집 여자의 집 청소를 하지만 돈도 떼이고 교통사고로 차도 사라지고 쉼터에 들어가지만 남자친구에게 아이도 뺏기고 만다.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 처절하게 살기 시작한 알렉스는 희망 없는 삶 속에서 수없이 쓰러지지만 끝내 무너지지는 않는다.



"여기 타일 틈새 청소비요."

"아뇨, 아니에요."

"여기 열라 번쩍거려요, 알렉스. 절대로 남들한테 이용당하지 말아요.

열심히 일한다고 부족한 느낌을 갖지도 말아요. 일해요. 믿을 건 그것뿐이에요. 다른 건 전부 쉽게 무너져요. 알았죠?"

     

알렉스는 딸을 안고 페리 바닥에서 노숙을 하는 한이 있어도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혼자 힘으로 청소일을 시작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가 호의를 베풀어도 책임지지 못할 감정을 팔지는 않는다. 힘들게 되찾아온 딸이 좋아하는 팬케익에 상상으로 시럽을 뿌려줄 수밖에 없어도, 영양보충지원 브로셔를 받아쓰며 자존심을 팔아야 했어도, 엄마일 때 알렉스는 늘 밝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렉스는 마냥 완벽한 인간은 아니다. 딸아이를 어린이집을 보내기 위해 청소업체 몰래 거래처를 싼값에 가져가기도 하고 음식을 슬쩍 훔쳐 먹기도 한다. 레지나의 집 청소를 해주다 충동적으로 그녀의 캐시미어 카디건을 꺼내 입고 샴페인을 몰래 마시기도 한다. 틴더를 통해 남자를 불러 자신을 부잣집 딸로 포장하기도 한다. 알렉스는 개인적인 욕망도 가득하고 사랑받고 싶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발버둥 치며 가끔 잘못된 선택도 한다. 그렇다면 알렉스는 좋은 엄마와 도덕적 자아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던 것일까? 아마 그 상황에서는 누구도 그렇게 강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알렉스와 차가운 이해관계로 얽힌 레지나는 알렉스에게 순간순간 위로받았던 값으로 손해 보고 살지 말라고 충고한다. 캐시미어 카디건을 벗어놓고 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 레지나의 눈빛은 이미 동지의 그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알렉스가 미주리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해서 딸과 함께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레지나는 캐시미어만큼 귀하고 소중한 인연이다.

이 이야기는 한 여자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야기이지만 그 여정 속에서 알렉스를 도와주고 알렉스가 도와주는 사람들이 꽤 등장한다. 알렉스는 폭력을 대물림한 아빠의 도움은 거절하고 자유로운 영혼과 정신착란의 엄마를 끝까지 껴안으려 하며, 자신이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청소 일을 통해 많은 이들을 돕고 돈을 번다. 알렉스는 스스로를 닦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내가 섬망증이야? 아니면 네가 빛이 나는 거야?”
“내가 빛나는 거야.”

     

누구나 한 가지쯤은 좋아하는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걸 찾았을 때 사람은 행복하다. TV 토크쇼에서 10대에 그래미상을 5개나 받은 어린 가수가 그런 말을 했다. 시상식에서 오 제발 내가 받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잡혔던 그녀에게 왜 그랬는지 묻자, 상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두려운 마음이 컸다고 고백했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이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의심한다고.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일은 아니라고 했다. 열심히 노력했고 꾸준히 그 길을 걸어온 시간들이 분명 존재했다고. 그래서 본인은 행복하다고 했다. 그래미상을 5개나 받은 사람도 스스로를 의심하며 사는데 평범하게 사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이 가장 큰 인생의 난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콜 중독에 빠져 더 이상 아이의 양육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된 남자친구 앞에서 알렉스가 자신이 빛나는 존재가 되었음을 인정하자 그 가수가 떠올랐다. 변기를 닦으며 들여다 본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에세이로 쓰며 작가로서의 삶을 꿈꾸던 알렉스가 다시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이제 딸과 자신만을 돌보며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정말 그녀에게서는 빛이 났다.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을 빛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된 알렉스는 이제 얼마나 행복할까. 그녀는 쉼터에서 간단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말한다. “진실은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글로 쓰는 게 훨씬 쉽더군요. 당신의 글을 빼앗아 갈 수 없어요. 당신이나 당신 말이 틀렸다고 할 사람은 없어요. 그렇지 않으니까. 당신은 옳고 당신 말은 열라 맞아요. 당신 것이니까요.”

 

“나의 가장 행복한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곧 올 것이다.”

     

수업 중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나의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였는지 묻는 알렉스. 그리고 마지막 수업에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답했다. “나의 가장 행복한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장학금과 학자금대출로 겨우 공부하게 될 청소부 엄마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지금껏 알렉스가 걸어온 길은 “300개 하고도 38개의 변기 청소와 일곱 가지 정부 지원, 아홉 번의 이사, 페리 선착장 바닥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내 딸 인생의 3번째 해 전부를 건 길이었고 알렉스는 이제 행복을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고.

     

이제는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가 되어버린 내 어린 시절 뽀얀 얼굴의 철인 28호를 떠올려보았다. 엄마는 왜 이렇게 힘든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걸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웃으며 나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엄마 옆에서 종알대던 그 밤들이 좋았고 내가 잘 커주는 게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자식을 위해 살았던 시간 말고 엄마의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였을까? 벌써 지나갔을까 아님 아직 오지 않았을까. 책을 좋아하는 엄마가 알렉스처럼 나를 데리고 도망가서 어디선가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엄마가 더 오래오래 살아서 더 최고로 행복한 날이 또 찾아왔으면 좋겠다. 엄마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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