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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미 Feb 22. 2024

지나온 것들




언젠가는 그 나무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의 것이라지만 확실히 나의 나무인 그 나무에 대해서.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해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다. 이사를 떠나기 전 살던 집은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집이었다. 안 방과 작은 방 그리고 한 평짜리 부엌 옆으로 양변기 하나가 겨우 들어간 화장실이 딸린 집. 여름이면 날개 달린 개미들이 문지방을 갉아먹고 나와 온 집안에 개미사체와 떨어진 날개가 눈처럼 소복이 쌓이던 곳. 풀풀 날리는 개미들의 날개를 치우고 또 치워도 어디에선가 끝도 없이 개미가 나오던 그 집에서 우리 가족은 4년을 살았다.


새로 이사 갈 집을 본 건 이사 당일 날이었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가는 이사였지만 어린 마음은 부풀어 있었다. 그 들뜸의 기저엔 어떤 기대감 같은 게 깃들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새로운 곳으로의 이동이야 말로 어떤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그러니 이사를 간다는 건 평균의 경계에 들지 못하는 우리 가족이 더 좋은 곳으로 나아가게 되는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같은 막연한 희망 같은 것이. 그러나 그런 기쁨은 잠시. 우리 가족의 세간이 들어가는 작은 문을 본 순간 나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배웠다. 어떤 없음에는 더 깊은 없음도 존재한다는 걸. 가난의 수렁엔 끝이 없고 때론 더 짙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앞으로 살아 나가야 할 집은 그 모든 과정을 겪지 않아도 보게 했다.


1층 셋방살이에서 반 지하 창고로 네 식구가 밀려난 날. 아빠와 엄마 나와 동생은 한 방에 누워 잠을 잤다. 고요하고 적막하던 밤. ‘우리 집’이라고 불릴 곳에 누워 바라본 천장의 무늬는 낯설고 어색했다. 얽히고설킨 무늬가 끝도 없이 이어지던 벽지를 눈으로 좇으며 생각했다.

‘어지럽다. 끝이 없다. 끝이 없다.’


네 명의 인간이 고작해야 두세 평짜리 공간을 점유하면서 사는 것은 정신적으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그 무렵의 나는 몸도 마음도 계속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늘 괴로웠다. 무엇보다 내 신경을 곤두서게 했던 건 반 지하 집에는 화장실이 집 안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창원의 주택은 구조상 건물의 대문 옆으로 간이 화장실 만들어 둔다. 우리가 살던 집은 대문 양 쪽에 각각 화장실 하나씩을 만들어 두었는데 우리 가족은 그중 왼쪽 편에 있는 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엄마는 오른쪽 화장실은 우리 집 지상 창고에 세를 든 자판기 사무실 아저씨들이 사용하는 곳이니 불편해도 왼쪽 편에 있는 화장실을 쓰라고 했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야 할 건 어떻게 하면 화장실을 적게 갈 수 있는지, 얼마나 잘 참아낼 것인가 하는지에 대한 것일 뿐. 화장실이라는 기본적인 본능조차 계산하고 준비해야 하는 일이 될 것이라곤 생각해보지 못했다.   


첫 생리를 시작하고 화장실을 가는 일은 내겐 더욱 고역이었다. 생리를 시작하면 부모님이 꽃과 케이크를 선물해 준다는 청소년 드라마 속 이야기는 재벌 2세와의 사랑이야기 보다 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첫 생리를 시작한 건 그 집에 산지 3년이 흐른 후였다. 이사를 오던 날 보다 훨씬 기울어진 가세에 생리대를 사는 일 조차 엄마에겐 부담이었다. 엄마는 내게 자신의 노동으로 갈아치울 수 있는 천 기저귀를 쓰게 했다. 반 지하 방, 습하고 눅눅한 공간에서 쓰는 천 기저귀, 그리고 그것을 교체하지 않고 최대한 오래 방치하는 것. 그래서 몸에 곰팡이 꽃이 피는 것. 내가 경험한 유년과 가난은 그런 것이었다.


가난의 경험이 집약된 그 집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가려운 몸을 긁고 때려가며 밤을 지새울 때면 어떤 날엔 엄마를, 어느 날엔 아빠를. 그마저도 지겨워지면 나라는 존재를 미워했다. 하지만 내가 미워하던 모든 대상이 동시에 지극히도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차게 미워하지도 그렇다고 격하게 사랑하지도 못하는 어설픈 사람이 된 것 같을 때면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이끌리듯 그 나무로 갔다.


나무는 반 지하 방에서 한 골목을 지난 곳에 있었다. 5미터 정도 높이의 제단처럼 쌓아 올린 돌담 성벽 위로 호젓하게 서 있던 두 그루의 느티나무. 300년이 넘은 그 나무 주변으로는 작은 공터와 놀이터가 있어 동생과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곳을 뻔질나게 드나들곤 했다. 보호수를 중심으로 잡기놀이를 하거나 놀이터에서 시소나 그네를 타던 어린 날의 나.

머리가 조금 자라면서 더 이상 놀이터는 이용하지 않았지만 가끔 지하방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나는 무작정 문을 열고 나가 나무 아래로 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반 지하에 살던 기간 동안  그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집 바로 앞에 그 나무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고 싶은 영어 학원에 한 달만 보내달라고 엄마에게 사정하던 날, 엄마가 울면서 미안하다는 대답을 했던 밤에도, 급식비 미납자 명단에서 내 이름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날에도. 홀로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 나무 곁으로 갔다. 그리고 나무 옆에 있는 평상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는, 그래서 내일도 그 자리에 있을 나무를 나는 좋아했다. 어느 날은 나무 아래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빌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피하고 싶어서 그곳에 갔다. 그리고 그렇게 나무 아래에 있으면 이상하게도 여전히 나무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무는 변하지 않음으로 변함을 감지하게 한다. 나무는 하나의 축으로 내 삶에 자리하고 있다. 미동하지 않는 무언가를 보며 동시에 내가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자꾸 실감하게 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진학하고 다시금 해가 드는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꽤 오래 나무를 보러 가지 못했다. 어쩌면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 그 나무를 포함한 그 시절 자체를 잊고 싶어서 발길을 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다시 나는 주기적으로 그 나무를 만나러 가고 있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과 반가운 마음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그 나무를 다시 보러 갈 수 있는 것은 내가 확실히 그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나왔기에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점을 말이다.   


지나온 것들.


나는 이제 나무 곁에서 잃었거나 잊어버린 것들을 슬픔 없이 떠올리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은 그렇게 떠올리게 된, 다시 돌아갈 수 없고 그래서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지나온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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