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감각하는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일까 후천적으로 자라는 것일까. 아빠는 식사를 할 때 마다 꼭 한 번은 크고 작은 볼멘소리를 했다.
‘국이 매번 왜이리 싱겁노’
‘니는 된장을 너무 묽게 끓인다’
‘밥이 되다. 내가 진 밥 좋아하는 거 모르나?’
아빠는 그렇게 해야만 다음 수저를 뜰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투정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 그런 아빠를 보며 엄마는 그저 소리 없이 눈을 한 번 흘기거나 두 말 보태지 않고 아빠의 전용 소금 통을 밥 그릇 옆에 놓아 주곤 했다. 반면 내가 아는 사람 중 엄마는 가장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엄마의 인내심도 아빠의 세끼 투정 앞에선 약해질 때가 있었다.
“당뇨 있는 사람이 짜게 먹으면 안됩니더”
“해주는 사람 성의를 봐서라도 그냥 한 번 먹으면 안됩니꺼?”
아빠의 짜증 섞인 말 뒤로 엄마의 부탁도 그렇다고 변명도 아닌 말이 더해지는 순간, 아빠는 숟가락을 탁 하고 내려놓고는 식사하기를 중단했다. 그러면 엄마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다시금 소금통을 내어 놓거나 ‘다음엔 좀 더 신경쓸게요’라는 말로 아빠의 심기를 돌려놓으려 했다.
반면 엄마는 독실한 종교인으로 밥을 먹기 전,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감사의 기도를 했다. 감사하는 태도를 하루 세 번 부인하는 사람과 그런 사람을 남편으로 두고도 매 끼니에 감사하는 아내 사이에서 자란 자녀들은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흔히들 행복은 만족감과 연결된다고 한다.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 그러니까 차고 넘치는 흡족함 까진 아니어도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감사할 줄 아는 것. 행복이 그런 사람의 것이라면 적어도 동생과 나는 행복의 기운을 예리하게 감각하는 사람으로,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으로 자랐다. 그리고 나는 이런 우리 남매의 성향과 기질이, 범사에 감사하는 엄마로부터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엄마의 깊은 참을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구석을 발견하고야 마는 능력이 엄마로부터 온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싶었다.
며칠 전 동생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나는 동생에게 말했다.
“얼마 전에 이런 글을 봤다? 자기 아버지가 암에 걸렸는데 글쎄 ‘암이란 인사할 시간을 주는 병이니 참 다행이지 않냐’고 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아버지는 아주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행복 유전자는 정말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 너는 어때?”
“뭐가?”
“낙천적 유전자 말이야. 그런 게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지. 근데 나한텐 없어.”
“왜? 너랑 나는 엄마 닮아서 좀 낙천적이지 않나?”
“그건 낙천적인 게 아니야. 그냥 생존 욕구 같은 거지.”
“생존욕구?”
“그래. 그냥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지. 사는 게 너무 비관적이니까. 미래에 희망 같은 게 있을 수가 없으니까 뭐라도 하나 좋은 거 발견하면 그거 의지해서 살아보려고 하는 거랑 뭐가 달라.“
나는 동생의 말을 부인하고 싶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에 기뻐하는 마음이, 사실은 더 우월하고 고귀한 태도이며 우리는 비록 가난했으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좋은 것을 유산으로 받았다 여기고 싶었다.
“누나는 지하 방, 해도 안드는 곳에서 god노래들을 때 진짜로 행복했나? 그냥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으니까 받아들인 쪽에 가까울 걸?”
선뜻 행복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 시절이 모조리 쓸모없었냐고 묻는다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살 수 있다면 돌아가겠냐는 질문 앞에서 난 내일도 모레도 아니오를 고를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누나나 나나 기미 주근깨 생각안하고 햇빛 보려고 쏘다니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지금도 똑같다. 행복하다고 난 말 못한다. 그냥 주어졌으니까 열심히 사는 거지”
행복을 더 크게 감각하는 유전자. 낙천적인 유전자는 있을지도 모른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어떤 기사에서도 본 것 같다. 내 유튜브 알고리즘 추천 영상에서도 어떤 심리학자가 비슷한 얘기를 한 것도 같고.
하지만 그것이 내 것이라고. 나의 성정과 기질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일은 어쩐지 주저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살아남고 싶은 마음. 이기적인 유전자 덕분에 이 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동생과 나란히 앉은 차창 밖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오의 끝도 없는 햇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