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한 클릭 소리

나는 '독립'을 꿈꾼다

by 최유나

몇 년 만에 옛 친구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미 오래전에 그의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나와는 달리, 그는 여태까지 내 연락처를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아이가 아직도 나를 생각하고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깨끗하게 잊어버렸으니까. 아니 잊었다기보다 애써 그 우정의 흔적들을 지우려 노력했고 나는 마침내 그것에 성공하고 말았으니까.

문자 메시지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그 친구는 나와의 재회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냉랭한 말투로 그 제안을 거절했고, 친구 역시 ‘네가 싫다면 없었던 일로 하자’라는 내용으로 다시 문자를 보내왔다.




고등학교 시절, 그 친구와 나는 아주 친하게 지냈다. 같은 반이었던 데다가 집도 가까웠던 우리는 매일같이 붙어 다니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 친구를 보다 신뢰하게 된 것은 내가 재수 시기를 보내면서였다. 먼저 대학생이 된 친구는 큰언니처럼 살뜰하게 나를 챙겨주었다.


재수 시절의 생일에도 나는 수능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책상 앞에만 앉아있었다. 그런 나를 위해 친구는 장미꽃을 들고 집으로 찾아와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수능을 앞둔 어느 늦가을 저녁, 친구와 나는 밖에서 잠깐 만나기로 했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를 생각지 못하고 얇은 옷차림으로 나간 나에게 친구는 입고 있었던 자신의 스웨터를 벗어서 내 어깨를 덮어주며 말했다.


“나는 감기에 걸려도 상관없지만, 시험을 앞둔 너는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내게 건넸던 편지들은 고단했던 시절에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힘든 재수생활을 견디고 대학에 들어간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나를 바라보는 친구의 눈빛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때 나는 전에 없이 변해버린 친구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서 많이 혼란스러웠다. 고민 끝에 어렴풋이 느낀 것은, 재수 때와는 달리 안정을 찾아가는 나를 친구가 시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재수 시절 친구가 내게 베풀었던 그 호의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동정심이었던 것인가. 친구의 대학 입학을 내가 진심으로 축하했듯이 친구 역시 나의 입학을 기뻐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가 장학생이 된 것을 내가 부러워하며 격려해주었듯이 내가 장학금을 탔을 때도 친구 역시 나에게 그러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내가 대학생활에 잘 적응하면 할수록 친구의 태도는 싸늘하게 변하고 있었다.


친구를 만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던 어느 날, 나는 그를 그만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만날 때마다 감정에 미묘한 상처를 받아가면서까지 친구와의 인연을 잇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더 이상의 갈등은 필요치 않았다. 바로 절교를 선언하는 메일을 작성했다. 그동안 마음에 쌓아두었던 서운함과 친구가 내게 상처를 준 말들을 나는 고스란히 뱉어내었다.


메일을 다 쓰고 난 후, 마우스 버튼을 깊게 눌러 ‘메일 보내기’를 클릭했다. 마우스의 경쾌한 클릭 소리는 친구와의 기억들까지 말끔하게 지워줄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친구의 석연치 않았던 태도와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생각이었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원치 않은 메일을 여러 번 주고받게 되면서 내 마음은 더욱 복잡하게 얽혀갔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친구에게 너무 의지했던 나의 한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나의 감정과 친구의 감정이 완벽하게 같을 것이라고 믿었던 건 내 어리석음이었다는 사실을 수용해야만 했다. 친구를 의지하고 신뢰했던 만큼 내 자아의 일부분도 어느새 그 아이에게 옮겨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와의 절교는 단순한 다툼이 아니라 그 친구에게 옮겨간 내 자아와도 헤어지는 일이 되었다. 그 당시 친구와 나는 날카로운 내용의 메일을 교환하고 있었고, 그 메일들은 서로의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던 진흙들을 휘저어놓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준 채 연락을 끊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친구가 나에게 냉랭했던 이유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자신의 대학생활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전공 공부에 확신을 가졌던 나와는 달리, 친구는 자신의 전공과 미래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늦게 대학에 입학한 내가 자신보다 활기찬 학교생활을 하는 것 역시 친구에게는 보기 불편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친구는 자신이 나보다 뒤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친구의 그런 내적 갈등을 알 수 없었고 그저 친구가 변했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굳이 절교선언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랬다면 다시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친구의 마음도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법정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물건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능동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관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동적인 방어책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함으로써, 훗날 그의 변심 때문에 받게 될 상처를 미리 막으려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나의 감정을 누군가로부터 완벽하게 이해받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불가능한 꿈이었다. 어쩌면 인간에게 의지하는 일은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내 것으로 소유하겠다는 욕심과 오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재수 시절 그 친구에게 의지하지 않았다면 친구의 변심도, 내가 받았던 상처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독립’을 꿈꾼다. 나의 감정과 생각까지도 혼자의 능력으로 오롯하게 세울 수 있는 그런 독립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겨울 때 다른 이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를 위로하고 치유시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만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의 지지대’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겪어야 할 미래의 고통들이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강해지기 위해 겪어야 할 수많은 난관들이 벌써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상처 위에 돋아날 새살은 나를 지켜줄 갑옷이 되고, 내 인생의 울타리가 될 것이란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