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둠봉사를 하고 있는 마르코 성서모임의 교재에서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는 질문이 있었다. 이전에 내가 모둠원일 때 쓴 답을 보니, 그땐 엄마가 편찮으시고 돌아가시는 등등의 그 상황자체라고 적었던데. 그런데 이번엔 사뭇 다르게 적었다. 나의 십자가는 내 자신이라고.
요즘의 내 십자가는 나 자신인 것 같다. 십자가를 단순히 '힘들고 버겁고 하는, 부정적인 것의 덩어리', 사실 덩어리라는 한국어 표현보다 塊(かたまり, 카타마리)라는 일본어 표현이 왠지 머리에 먼저 떠 올랐는데, 어쨌든 십자가를 '부정적인 것의 덩어리'라고 생각하면 차마 나 자신을 십자가라고 말하진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십자가는 부정적인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요즘 나에게 나 자신은 '잘 짊어지고 가되, 살살 달래가며, 앞으로의 발전가능성도 보이는, 언젠가는 내 삶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집약체인 것으로 느껴진다.
최유나라는 나 자신을 데리고, 내 삶을 살아내는 게 사실 만만치는 않다. 나라는 인간은 적절히 현실감이 떨어져서,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삶에서의 가치와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하려고 하고, 그것이 스스로 납득되어야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당연히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배우고 싶어하는데, 여기서 문제는 그 과정이 나에게 마냥 편하거나 즐겁지는 않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상반된 인간인 데다가 거기다 외부의 자극에도 예민하고 자신으로부터인 내부의 자극에도 예민하여, 나는 생각하는 것도, 뭔가 끄적이는 것도 많은 인간이다. 또 그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생각을 일단 밖으로 쏟아내야 내 마음이 평안한 수평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자극들을 잘 해석하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과정이 있어야 나는 안정을 얻는 듯하다.
이런 인간인 나 자신을 다독다독하며, 어려운 과정을 지나 삶의 근본적인 가치를 찾기 위해 스스로를 격려하며, 행복하게 살아내는 건 나에게 참 십자가 같은 일이다.
그러나, 나라는 십자가를 들쳐 매고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언젠가는 하느님이라는 궁극적인 가치, 그 근처 비스무리하게라도 어디 즈음에 도달할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 자신은 스스로에게 어쩌면 고통이지만 희망이기도 하다.
오늘 미사를 집전하신 신부님의 강론과, 며칠 전 본인의 강론을 감사히 나눠주신 신부님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듣는 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히 들을 준비를 하자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 자신이 십자가로 느껴지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감사하기까지 하다. 삶을 통해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덧 1.
성탄판공도 안 하고 버티고 있었는데 드디어 고해를 했다. 잘 오셨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감사했다.
덧 2.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분이 수녀님께 자꾸 귀신이 보인다고 했더니 수녀님이 그르셨단다. 하느님이 귀신보다 더 세고 성당이란 공간도 귀신보다 세니 걱정 말라고. 때로는 형이상학적이고 수사법 가득한 말보다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말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