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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Feb 21. 2024

뚱이는 황구(黃狗)예요

이귀복의 수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을 참 바보로 만든다. 재래종 개 한 마리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개로 느껴지니 이 일을 어쩌나. 듣기 좋은 말로 재래종이나 진돗개 잡종이라 부르지만 우리 뚱이는 좀 거시기한 말로 소위 똥개다. 제 눈에 안경이라더니 ‘똥개 한 마리’에게서 우주적 기쁨을 느끼는 나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위인임이 분명하다. 


  뚱이는 태어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나를 만났고 나랑 함께한 시간도 다섯 해가 되었다. 주먹만 하던 녀석이 지금은 멋진 ‘청견(靑犬)’으로 자랐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뚱이가 이렇게 커 버릴 줄 정말 몰랐다. 아무리 동물이라고 해도 첫 눈에 반해버린 그 사랑을 나는 운명이라고 우기고 싶다. 개 한 마리를 두고 웬 호들갑이냐고 핀잔을 준다 해도 다른 표현을 할 수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평소 나는 개를 아주 싫어했다. 애완견을 안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차라리 아이를 입양하여 기르는 것이 편이 훨씬 생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강아지를 인형처럼 예쁘게 꾸며서 끌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인간들의 만족이지, 강아지 입장에서 보면 학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그런 것 말고도 내가 정말 개를 싫어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던 나는 아버지가 떠올려지는 무의식적인 기제를 애써 피하려했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유별나게 개를 좋아했다. 시골집 마당에는 늘 여러 마리의 개들이 뛰어다니며 뒤엉켜 놀았고, 아버지가 저들을 부르면 개들은 아버지 곁에 모여들어 온갖 재롱을 부렸다. 그때만은 아버지도 행복한 것 같았다. 아버지가 개들에게 붙여준 일본식이름은 모두 ‘루’자로 통일되어 있었다. 마루 ․ 베루 ․ 메루 등으로. 


  게다가 나에겐 개와 관련된 엄청난 사건도 있었다. 스물세 살 때였던가. 친구 집에 간 일이 있었는데 친구 대신 호랑이만한 셰퍼드 두 마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혼비백산한 나는 정신없이 그 집을 뛰쳐나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 다리에 개의 이발자국이 여러 군데 있었다. 다 큰 처녀애 다리에 난 이빨자국을 보고 엄마는 노발대발하였고, 개를 풀어놓았던 친구엄마는 몹시 미안한 얼굴로 나를 물어버린 그 녀석들의 털을 잘라 우리 집으로 왔다. 엄마는 그 털을 불에 거슬려 가루를 만든 뒤 내 상처에 발랐다. 


  그런 전력이 있는 내가 개를 키우게 되다니! 작고 예쁜 애완견도 아니고 몸집이 13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중형 토종개를 그것도 아파트에서. 그러나 모든 것은 내 탓이 아니다. 뚱이와 나의 인연은 바로 그 ‘순간’ 겹칠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확신하는 것이다. 


  황사가 심한 봄이었다. 캠퍼스에는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꽃들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비탈진 언덕길을 힘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교수님들은 늙은 학생인 나를 아끼고 격려해주었지만 그날따라 이론에 대한 나의 공부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교수님로부터 질책을 받은 것이다.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밤을 샌 탓에 수업을 받을 수 없을 만큼 힘이 빠져 있었다. 입학의 기쁨은 순간이었다. 아무리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다 해도 쉰이 넘은 나이에 공부에 도전한 내 자신이 그제야 무모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국문학이라고 해도 폭넓은 이론이 바탕이 되어야하는 보고서 작성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학문적 기초가 부족한 나에게 그 일은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참고서적은 몇 쪽 읽지도 않았는데 창문이 훤해질 때의 그 낭패감. 먹고 자는 일을 줄여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배우는 일에 나이가 없다고 누가 말했는가. 체력은 마음에게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나는 회의했다. 평균 스무 살의 격차가 벌어지는 동급생들과의 소통도 그랬지만,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내가 선택한 학업이 혹시 정신적 허영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발가벗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공부는 진정 내가 오랫동안 꿈꾼 것이었다. 그래, 늦었지만 하고 싶었던 일은 평생을 걸고라도 해보는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도 없는 일, 환경을 탓하며 안주했다가 내 삶이 끝나는 날 영혼의 공허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뚱이를 만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지하철 계단을 막 내려서려는데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 틈 사이로 고개를 디밀었다. 라면 박스에 담긴 강아지 몇 마리를 앞에 놓은, 한 남자가 지하철 입구에 앉아 있었다. 겨울동안 추위 때문에 방에서 돌본 강아지들인데 다 기를 수 없어서 데리고 나왔다는 것이다. 강아지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랜만에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솟구쳤고 모든 것이 순후한 평화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생명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힘이었다. 나는 어느 새 사람들 틈에 퍼질러 앉아 강아지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놈, 뒤엉킨 채 하품하는 놈, 귀엽고 앙증맞은 강아지들의 몸짓에서 나는 기쁨을 느꼈다. 그때 막 잠에서 깨어난 강아지 하나가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 녀석의 맑은 눈과 내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 눈에 풍덩 익사해버렸다. 


  뚱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어미젖을 갓 뗀 강아지를 키우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밤마다 어미를 찾아 울어대는 통에 남편의 잔소리를 감수해야 했고, 하얀 젖니가 나는가 했더니 어느새 그 이빨 몇 개가 바닥에 흩어져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한밤에 단골 병원 의사와의 전화 끝에 강아지도 사람처럼 젖니가 빠지고 영구치가 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뚱이는 이제 늠름한 성견으로 자라났다. 한때 아파트에서 뚱이를 기르는 것이 이웃들에게 미안하여 가까운 시골로 보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뚱이를 보내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건 뚱이에게도 큰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뚱이와 함께 살아갈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할 밖에. 그래서 짜낸 묘안은 뚱이의 습관에 맞추어서 우리가 늦게 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 잠들어버리면 뚱이는 짖어대기 때문이다. 게다가 뚱이란 놈은 꼭 한밤중에야 똥을 누기 때문에 그 뒷일의 처리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뚱이가 잠들 때까지 각자의 일을 하며 새벽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내가 자라서 집을 떠날 무렵, 정말 송아지만큼 몸집이 큰 개가 우리집에 있었다. 혹한이 계속되던 어느 겨울, 마당에 있는 수세식 화장실이 얼어서 화장실 사용이 어렵게 되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연탄화덕을 들여놓아도 얼어버린 화장실 수도관은 녹을 기미도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곤란을 겪는 것과는 달리 덩치 큰 그 놈은 눈을 껌벅이며 마당에서 시원하게 볼 일을 보는 것이 아닌가. 화장실이 막혀 녀석의 뒤를 치우기도 난감해진 나는 개에게 화풀이를 했다. 엄마 고무신 한 짝을 들고 개에게 다가간 나는 녀석의 등줄기를 마구 후려쳤다. 억울한 눈빛이었지만 처음엔 반항도 않고 맞아주던 녀석의 눈에서 한 순간 파란 불이 번쩍했다. 그때 나는 너무 무서워서 고무신을 내던지고 달아났다. 지금도 그 개의 원망 가득한 눈빛이 떠오른다. 묶인 개가 그 자리에서 뒤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어쩌자고 나는 그 개를 그렇게 구박했던 것일까. 그 날의 내가 새벽잠을 설치면서 뚱이의 뒤를 치울 오늘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새가 아무 나무에나 앉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려서 앉는다고 한다. 인연 역시 억지로 만든다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뚱이와의 인연도 분명 몇 겁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일게다.

이제 여름이 되면 뚱이와의 산책도 힘들어질 것이다. 작년 여름에도 짓궂은 남정네들이 지나가는 뚱이를 보고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 저 개가 황구(黃狗)인데….”

그 말을 들은 다른 남정네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이렇게 대꾸하지 않았던가.

“맞아, 저런 녀석을 ‘불개’라고 하지. 이 삼복에는 최곤데 말이야!”

나는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 또 다시 꿈꾸기에 도전한다. 

  그래 뚱이야. 조금만 기다려. 오래지않아 엄마는 넓은 마당이 있는 전원주택을 꼭 장만할 거야. 그때까지 우리 조금만 참자.







뚱이도, 저의 어머니이자 이 글을 쓴 이귀복 수필가도 지금 제 곁에는 없는지라, 이 작품을 보면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어머니가 전원주택을 마련하기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 아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뚱이와 엄마는 만나서 잘 지내고 있겠지요. ^^  









매거진의 이전글 앞으로 이귀복 수필가의 글을 조금씩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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