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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Apr 03. 2024

스피릿, 향기로운 선물

   “큰 고비 넘기신 축하선물로 드려요.”


  기타 학원 선생님이 내게 쇼핑백에 담긴 위스키를 건네셨다. 비싼 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위스키에 일가견이 있는 선생님이 축하의 마음을 담아 준비하셨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충분히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다.

   기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0년 전이었다. 어린 시절에 피아노를 배웠지만, 피아노는 나와 썩 맞는 악기 같지 않았다. 대학입시를 끝내고 여유가 생기자 클래식 기타를 배우고 싶었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마음이 되살아났고, 마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클래식 기타 학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찾아간 그곳에는 스페인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하신,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선생님이 계셨다.


   내가 20년 동안 기타 학원을 줄곧 다녔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 일본 유학 시절 동안, 그리고 집안에 여러 일이 있을 때는 오랫동안 레슨을 쉬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신기할 정도로 선생님과의 연락은 계속 유지되었다. 선생님이 이웃사촌이기도 해서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것도 한몫했던 것 같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내가 삶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마치 친척 조카를 챙기듯 나를 토닥이고 걱정해 주셨던 선생님 부부의 마음 덕분이었다.





   나는 지금 박사과정 중이다. 입학한 후 첫 몇 학기는 ‘박사과정 학생’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만으로도 뿌듯했고 덕분에 바쁜 학교생활을 견뎌낼 힘이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맡은 여러 업무와 도무지 진척되지 않는 개인 연구로 몸과 마음은 이내 지쳐버렸다. 내 능력에 대한 실망과 무기력해진 마음은 평생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두드러기와 식도염으로 이어졌다. 두드러기 약을 먹으면 견딜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와서 쓰러지듯 여러 시간을 자야 했고, 약을 먹지 않으면 온몸이 견딜 수 없이 가려웠다. 소화도 되지 않아 식사를 거르면서 보낸 몇 달은 지금 돌이켜봐도 참 괴로웠던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바람 쐬는 기분으로 갔던 기타 학원에서 선생님은 지친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씀하셨다.


   “유나 씨. 매사에 너무 애를 쓰면서 열심히 할 필요는 없어요. 건강은 한순간에 무너지기도 하니까 무조건 건강을 챙겨야 해요. 저랑 오래오래 봐야죠. 아프지 마세요.”


   나는 당시의 내 컨디션이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선생님은 내 근황을 다 알고 계신 듯했다. 하긴 선생님은 나의 20대와 30대를 지켜보셨고, 본인 역시 외국에서 공부를 하셨으니 내 성향과 처한 상황을 모르실 수 없었다.


   그러다 올봄, 졸업을 위한 큰 관문을 넘게 되었다. 재학 중인 학교는 ‘SCI급’이라 불리는 해외 저명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이 박사과정 졸업의 필수요건인데 내 논문이 학술지에 드디어 실린 것이다. 영어로 적힌 내 이름과 논문의 제목을 눈으로 더듬으며 처음 들었던 감정은 감격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밤을 새웠던 여러 날을 회상했고 내가 그 과정을 중도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동안 곁에서 응원해 준 이들의 모습이 마음을 간지럽히며 머릿속에 그려졌다.


   삶의 나이테가 더해질수록, 나의 기쁜 일을 편히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참 얼마 없다는 생각을 점점 하게 된다. 그건 상대의 인격적 부족이라기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인 것 같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아주 친하거나 미더운 사람이 아니면 굳이 내 성취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됐다. 이유야 어떠하든 나로 인해 누군가가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나 또한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타 선생님은 나의 기쁨을 편히 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분이다.






   선생님은 위스키를 부르는 별칭인 스피릿(spirit)이란 단어가 맘에 들어서 위스키가 좋아졌다고 하셨다. ‘spirit’에 ‘영혼’과 ‘마음’이란 뜻도 있는 걸 생각하면, 선생님이 주신 위스키를 단순히 술로만 생각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선생님은 술인 위스키를 주신 것이 아니라, 위스키에 ‘격려’라는 스피릿을 가득 담아 나에게 주신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과 몸이 더없이 힘들었던 시절에 선생님이 건네셨던 말처럼, 건강하게 오랫동안 레슨을 받으며 내가 앞으로 맞이할 여러 성취의 순간을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다. 그것은 살뜰히 챙겨주시는 기타 선생님과 사모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스피릿’인 것 같다. 잘 숙성된 위스키가 그러하듯, 믿을만한 어른이 보내주시는 따뜻한 신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없이 향기롭게 나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에세이문학 24년 여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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