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중에 떠올랐는데요, 자매님 세례명으로 에디트 슈타인이 어떨까요? 자매님 마음에 드는 것이 제일 중요하니까 성녀에 대해 한번 찾아보세요.”
프란치스코 신부님은 미사 후 나와 어머니를 부르시더니 다정하게 말씀해 주셨다. 일주일 전에 어머니가 내 세례명을 추천해 달라고 신부님께 부탁했는데 감사하게도 챙겨 주신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에디트 슈타인’(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성녀를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깊고도 강인한 눈빛을 가진 성녀의 사진이 등장했다.
성녀 에디트 슈타인
나는 20대 후반이던 2006년에 예비신자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 성당에 간간이 가긴 했지만 세례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예비신자 모두가 그러하듯 나 역시 나에게 어울리는 세례명을 찾기 위해 골몰 중이었는데, 어머니가 신부님께도 여쭤보자고 이야기한 것이다.
에디트 슈타인은 1942년에 아우슈비츠에서 순교했고 1998년에 시성된 현대 독일의 성녀이다. 신부님께 세례명에 대해 여쭤봤던 2006년에는 성녀가 시성된 지 10년도 되지 않았던 때였다. 성녀가 무신론자였으나 회심하여 자신의 의지로 세례를 받은 점, 성녀의 수도명에 ‘데레사’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나도 한동안 무신론자였으며, 데레사를 세례명 후보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녀가 현상학의 권위자이자 철학 박사였다는 것을 알고서는 신부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때 인류학 전공 석사과정 중이었고, 학업을 이어 나가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신부님께 그런 나를 가리키며, 공부에 뜻이 있는 내게 잘 어울리는 세례명을 알려 주십사 요청했다. 어쩌면 욕심일 수 있는 그 청까지도 신부님은 모두 품어 주신 것이다.
일주일 후, 신부님께 에디트 슈타인 성녀에 대해 찾아봤으며 성녀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겠다고 말씀드렸다. 신부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하시며, 호칭은 ‘에디트’로 하면 된다고 알려 주셨다. 그때부터 신부님은 나를 ‘에디트 자매’라 부르셨고, 세례 후에는 모든 신부님이 나를 그렇게 부르셨다. 에디트 슈타인에 대해 잘 모르는 신부님들은 처음 듣는 세례명이라며 관심을 가져 주셨고, 아시는 분들은 참 좋은 이름이라며 무척 반가워하셨다. 그 말씀들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나와 함께해 주신 성녀와 주님
세례를 받을 때만 해도, 배움의 길을 무리 없이 지속할 줄 알았다. 물론 공부는 어려웠지만, 나는 그 꿈을 묵묵히 지켰으며 부모님도 그러한 내 뜻을 지원해 주셨다. 그러나 그 꿈은 어머니의 병환이라는 예상 밖의 일로 좌절되었다. 당시 나는 일본 유학 중이었는데,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유학 생활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했다. 그 후 나의 하루는 오로지 간병으로만 채워졌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2년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고 어머니는 사라져 버렸다. 신앙인답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애초부터 내 운명에는 학자의 삶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결론 내렸고 공부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환자의 보호자로서 했던 경험이 사회복지사로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사회복지학 공부는 우연한 계기로 박사과정까지 이어졌다.
박사과정은 만만하지 않았다. 박사과정생은 개인 연구물을 학술지에 꾸준히 발표해야 했는데, 간병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우울감이 뒤늦게 발현되었고 연구의 압박감과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나는 무척 무기력해졌다. 누워 있으면 방바닥은 수렁으로 한없이 꺼져 가는 것 같았고 몸은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더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때 다행스럽게도 청년성서모임 요한 연수를 다녀올 수 있었다. 연수를 계기로 나는 기력을 조금씩 되찾았고 미뤄 두기만 했던 연구도 시작했다. 연구 주제는 고령인 친정어머니를 돌보는 장녀들의 생활과 생각을 현상학적 방법으로 탐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철학 전공생이 아니기 때문에 ‘현상학’이라는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연구 과정 중 ‘현상학적 방법’이라는 이름을 만난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에디트 슈타인이 언급될 때마다 함께 거론되는 것이 성녀가 연구했던 ‘현상학’이라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현상학이라는 단어는 성녀가 지친 나에게 보내 주는 사랑의 메시지인 것 같았다. 성녀가 나를 위해 전구(轉求)하고 있음을, 주님께서 내 곁에서 토닥이며 격려하고 계심을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이 식을세라 대녀가 미국 여행에서 사다 준 에디트 슈타인 상본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논문 작업에 몰두했다. 작업에 지칠 때면 성녀와 눈을 맞춰 가며 나를 다독였다. 그렇게 썼던 논문은 올해 봄, 다행스럽게도 해외 학술지에 게재되었고 학문적 성장의 디딤돌이 되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은총과 계획
에디트 슈타인 성녀는 “신앙은 하느님을 붙잡는 것이며, 은총 없이는 믿을 수 없다.”고 했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무엇으로 만드실지 알고 계시기에, 내가 그것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 중). 한동안 무신론자였던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되어 에디트 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은총 이외에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포기했던 학문의 길을 돌고 돌아 다시 걷고 있는 것도, 성녀의 말씀처럼 나를 무언가로 만들고 싶으신 하느님의 계획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내 세례명에는 에디트 슈타인 성녀의 빛나는 삶은 물론, 세례명으로 내 꿈을 지지해 주던 어머니의 마음, 그리고 귀한 세례명을 일러 주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사랑이 녹아 있다. 학문과 신앙에 대한 성녀의 넓고 깊은 사상을 이해하기엔 나는 그저 부족한 인간이지만, 성녀가 남긴 흔적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삶의 나침반이다. 언제일지 모를 훗날 에디트 슈타인과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을 때, 당신들의 보살핌과 크신 분의 은총이 나를 늘 위로하고 다독였다고 말하고 싶다. 늦은 밤, 무심히 올려다본 하늘에 반짝이던 수많은 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