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을 때 어느 날의 미사였다. 평상시에는 습관처럼 입으로만 웅얼거리며 외우던 사도신경이 그날따라 신기하게도 웅장하고 벅찬 서사가 되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 이미지는 천주 성부(聖父)가 자신의 전능을 발휘하여 세상을 만드는 장면부터 시작되었다. 성부께서는 SF영화의 첫 화면 같은 별이 가득한 우주 한가운데에 옷깃을 날리며 세상의 모든 것들 만들고 있었다. 곧 장면이 전환되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낮았지만 따뜻했고 위대한 탄생 장면이 그려졌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것은 성삼일(聖三日)의 이야기였다. 그 시간 동안 예수님이 겪었던 화려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는 시리도록 투명하게 마음 위로 떠올랐다. 그것은 다시 여인들이 마주했던 빈 무덤의 풍경으로 이어졌으며 이윽고 하늘에 올라 ‘이 세상 끝까지 내가 함께 하겠다’고 외치던 거룩한 목소리로 끝을 맺었다.
천주의 위대함과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모두 갖고 있었던 성자(聖子)에 대한 감동을 안은 채, 선언하듯 내 입술에서 나온 말은 ‘성령(聖靈)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믿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은총이자 기적일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보편성과 모든 성인들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는 구절에서는 성삼위 안에서 시간의 횡적인 공간은 물론, 내세로 이어지는 종적인 공간까지 하나로 이어지고 있는 ‘시작도 끝도 없는 세상’의 모습이 그려졌다. 미사 중의 나는 1평도 채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지만, 성삼위 안에서 이어졌던 거룩한 역사와 신앙의 선조들과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죄의 용서를 믿고 나의 부활을 믿으며 그리하여 영원한 삶을 믿는다는 마지막 구절에 다다르자 내가 목소리를 맞춰 사도신경을 바칠 수 있는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그날따라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사도신경은 그 의미대로 열두 사도의 신앙을 정리한 내용일 것이다. 2000년 전 사도들의 신앙을 지금 한국의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참 신비로운 일이다.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이나, 성삼위 안에서 신앙의 조상들이 굳세게 지켜온 깊은 믿음은 지금의 나를 지켜주고 지탱해주고 있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희망이자 기쁨이다.
내 신앙은 금도 가고 듬성듬성 이가 나간 유리그릇처럼 초라해질 때도 많다. 초라해진 모습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두려워 예전에는 그런 내 모습을 외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부족한 피조물이므로 뿌옇게 변한 모습도 내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자랑할수록 성삼위의 존엄함과 교회 공동체 성인들의 빛나는 믿음이 그 틈을 채워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부족한 모습에 자책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로 했다. 그리고 사도신경은 부족한 내가 빛으로 나아갈 수 있게 빛의 본질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었다.
영광스러운 서사로 그려졌던 그날의 사도신경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환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때의 가슴 벅찼던 기도 중의 감동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천주로 시작되어 성자와 성령을 지나 사도로 이어지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순간에, 여리고 부끄러운 내 신앙도 함께할 수 있길 꿈꾼다. 그러면 나의 믿음이라는 유리그릇은, 아니 ‘나’라는 나약하고 여린 존재는 존엄한 존재들 곁에 기대어 영롱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