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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밥 또는 약식

순남씨의 부엌에서 내가 컸다

우리 집에서는 약밥이라고 했던 것 같다. 약이되는 밥도 아닌데 왜 약밥인가 했더니 꿀이 들어가는 음식에 ‘약’이라는 한자를 썼다고 한다.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해야 할 때부터 나는 떡보다는 빵을 많이 먹고 살아 왔다. 내 어릴 적 별명이 ‘빵순이’ 아닌가. 빵은 간식으로 먹기 보다는 ‘밥빵’이라고 하여 단맛이 적은 빵들을 찾게 되었다. 떡은 여전히 간식이다. 이상하게도 단맛이 없는 떡은 맛이 없다. 

     

그래도 가끔 떡이 생각날 때가 있다. 절편, 막걸리 떡(증편), 호박고지가 들어간 시루떡. 덩달아 약밥도 먹고 싶어진다. 아마 어릴 적 먹던 버릇이 장기기억에 저장되어 있다가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듯하다. 빵도 그렇고 떡도 그렇고 남이 만들어 놓은 것에 대가를 지불하고 먹는 신세가 되어 있다. ‘홀로 도시 살이’가 길어지니 손 많이 가고 일정량을 만들어야 제대로 맛이 나는 음식을 시도하기도 영 내키지 않는다.    

  

얼마 전 부산 출장을 가게 된 몇 일 전부터, 이미 마음 속으로 작정한 것이 있었다. 부산역 대합실에는 떡집이 한 곳 있다. ‘떡공방 형제’라는 떡집이다. 파스구치 커피숍과 카카오 프렌즈 사이에 있다. 이 떡 집에 가서 약밥(약식)을 사올 예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못 사왔다. 약밥이 다 팔려 못 사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미리 사서 물품보관함에 넣어 두었다가 올라오는 길에 찾을까도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떡공방에 들어가기는 했었다. 일이 끝나고 귀경할 기차를 기다릴 참에, 동행이 된 어르신과 떡집에 앉아 팥소가 들어간 절편과 유자차를 마셨다. 그럼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쉬웠다.

      

부산에서 돌아온 다음 날 매년 이맘때면 다이어리를 구입하는 상장에 갔다가 약밥을 만드는 밀키트를 발견했다. 옷팔고 문구팔고 가구파는 곳에서 언제부터인가 먹을 것도 판다. 다 파는구나. 궁금하기도 하고 전날의 아쉬움도 만회하자고 약밥 밀키트를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 난생처음 약밥을 만들어 봤다.      


밀키트의 조리법대로 전기밥솥으로 만든 약밥은 ‘먹을 만’했다. 할머니의 약밥보다 덜 달고 기름기가 적다. 할머니는 참기름을 어느 단계에선가 넣으신 것 같은데..... 이렇게 모든 재료를 한꺼번에 넣고 만드신 것 같지 않다. ‘카라멜 소스’라고 해서 검은 병에 담긴 찐뜩한 액체를 뜨거운 밥에 넣고 섞으셨는데..... 어떻게 만드셨던 걸까.      


전기밥솥을 사용하는 간단한 약밥 레시피에서 캐러멜 소스의 핵심재료는 흑설탕과 진간장이다. 약밥의 향은 계피가루다. 다시 여기저기 찾아 본 바로 ‘제대로’ 약밥을 만드는 것은 아주 번거로운 일이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다음과 같다.      


① 불린 찹쌀을 찐다.

② 찐 찹쌀에 캐러멜 소스를 골고루 섞는다.

③ 밤, 대추, 건포도, 잣을 넣고 다시 쪄 낸다.      


할머니는 참기름을 어느 단계에서 넣으셨을까. 2단계? 3단계? 할머니 약밥은 기름기가 좔좔 흘렀었다. 캐러멜 소스가 ‘색깔 내기용’으로만 사용되었었는지도 알 수 없다. 흑설탕이나 간장을 넣으셨던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1단계를 마친 찐 찹쌀의 허연 수증기가 부엌에 퍼지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겨울이었나 보다.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약밥이 가끔 먹고 싶어지는 것은 어릴 때 먹어 봤기 때문이다. 달기도 하지만 약간의 짠맛의 유래가 소금이 아니라 간장에서 나는 것이라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약밥은 간식도 되지만 식사 대용으로도 먹을 수 있다.       


내가 한 때 카푸치노 위에 계피가루를 뿌려먹는 것을 좋아했던 것, 여전히 팬케이크나 토스트에 뿌려 먹기 위해 계피가루를 사 두는 것도 모두 약밥 때문인 것 같다. 할머니는 어디서 계피가루를 구하셨을까. 다음에는 흑설탕을 사서 캐러멜 소스를 만들어봐야겠다. 그래도 여전히 찐다는 것이 부담스럽긴 하다. 설거지거리가 많이 나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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