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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야 굿바이

순남씨 부엌에서 내가 컸다

이제 멸치도 구입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물용은 더 이상 구입하지 않고 있다. 이미 갈무리되어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는 약간의 조림용 멸치까지 다 먹고 나면 멸치도 이제 그만이다. 직장을 따라 서울로 올라오면서 나의 냉장고를 갖게 되었을 때부터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멸치다.      


멸치를 언제부터 먹었을까를 묻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평생의 반찬이다. 할머니가 잔치국수 만드시며 부어주셨던 국물이 멸치 육수였다. 내 손바닥 크기의 동그랗고 납작한 모양으로 구멍이 송송 뚫린 ‘스뎅 다시통’에 엄지손가락만한 멸치가 꽉 들어차 있던 장면이 기억난다. 김칫국에는 멸치를 그냥 넣어 끓이시곤 했다. 나는 젓가락으로 김치를 살살 치워가며 퉁퉁 불어 원래 보다 두 배는 커져 버린 멸치를 국그릇에서 건저 국그릇 아래 살짝 숨겼다. 걸리면 혼나니까. 편식한다고.      


할머니의 멸치 볶음은 설탕 때문인지 물엿 때문인지 바삭하다 못해 딱딱했다. 서로 엉켜있는 멸치를 떼어내려고 젓가락을 수직으로 잡고 멸치볶음을 콕콕 찍어 떨어져 나온 것들을 먹었다. 할머니의 멸치 볶음은 늘 달달했다. 식탁이 생긴 후에는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에 멸치볶음이 담긴 반찬통이 항상 있었다. 당연히 내 도시락 반찬통에서 자주 멸치들이 누워있었다. 할머니는 지리멸(세멸)로 볶음을 만드셨는데 나는 손질하기 쉬운 중멸로 볶음을 한다.      


2017년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물고기는 오징어, 새우 다음으로 멸치란다. 멸치 뒤로 굴, 명태, 고등어 순이다. 우리 집에서 그나마 자주 먹었던 물고기가 멸치와 고등어였다. 멸치는 볶음으로 고등어는 구이였다. 할머니는 고등어조림을 안하셨다. 새우를 구경한 적은 없고, 오징어는 중학생일 때 마른 오징어로 처음 맛을 봤던 것 같다. 굴은 울산으로 시집간 이모가 명절 때 간간히 보내줬다. 할머니는 생굴로 할아버지 드시게 우선 챙기시고 나머지로 굴전을 만드셨다. 나는 물컹한 식감에 먹지 않았다. 명태가 동태라면 동태찌개는 겨울에 아주 가끔 먹었고 제사상의 전으로 올라갔다. 멸치만큼 정말 만만한 물고기가 없었다.      

(자료출처 :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수산물은? - 리얼푸드 2017.03.21.)

https://realfoods.heraldcorp.com/view.php?ud=20170321000468&ret=section     


나는 멸치를 사면 멸치의 머리를 몸통에서 분리하고 배를 갈라 검게 말라붙은 내장을 걷어내는 갈무리를 해 둔다. 내장을 그대로 두면 먹을 때 씁쓰름한 맛이 난다. 멸치 머리는 따로 모아 한 번에 멸치 육수를 만든다. 어두육미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멸치 머리만으로 만든 육수보다 멸치 몸통으로 만든 육수가 더 진하다. 멸치 갈무리하는 법을 할머니한테 배운 것 같지는 않다. 내 기억 속 멸치들은 늘 머리도 그대로고 몸도 그대로 보전된 상태였으니까. 여하튼 나는 멸치를 갈무리해서 먹었었다.     


생각해 보니 1인 가구에게 가장 만만한 물고기도 멸치같다. 스스로 요리를 해서 먹고자 하는 사람에게 멸치가 그나마 접근도가 높다. 요즘 조리가 되어 한토막씩 포장된 생선구이도 쉽게 구입할 수 있지만 재료를 직접 사서 직접 만들어 먹는 행위를 하기에 그나마 쉬운 물고기가 멸치인 것 같다.      


미끌미끌한 생선 다듬기가 보통 꺼려지는 일이 아닐 수 있다. 용기내어 손질한 후 손, 칼, 도마, 싱크대,에 남아있는 비린내를 청소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생선 한토막 먹자고 이렇게 난리를 피울 일인가. 생선은 굽든 지지든 온 집안에 냄새를 남긴다. 이 또한 처치곤란하다.      


이에 비하면 멸치는 건조된 상태여서 손질하기도 좋고 요리 후 집에 냄새가 많이 남지도 않는다. 정말 요리하는게 지긋지긋하게 싫다면 멸치를 전자레인지에 1분 이내로 돌려서 고추장에 찍어만 먹어도 밥반찬이 된다. 얼마나 간편한가.     


거기다 생선구이는 남겨서 다음에 먹기가 더 곤란하다. 멸치는 두고두고 먹는다. 가끔 먹는 생선구이도 남기기가 싫어 억지로 다 먹다보면 고역스러울 때가 있다. 멸치는 내가 먹는 양도 조절 가능하다.      


이렇게 여러모로 나에게 딱 맞는 물고기인 멸치를 이제 그만 먹으려 한다. 그 구수하고 깊은 감칠맛의 멸치 육수를 이제 만들지 않을 것이다. 정말 멸치볶음을 먹지 않고 남은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진다.      


[내만나먹레시피]

-멸치볶음의 바삭한 식감은 볶음 양념을 하기 전에 미리 멸치를 마른 프라이팬에서 잠깐 덕으면 된다. 기름을 두르지 않고 볶는다는 것.

-더 바삭하게 먹고 싶다면 멸치와 식용유만으로 살짝 미리 볶으면 된다.

-멸치의 비린내는 양념을 만들 때 소주를 조금 넣으면 잡힌다. 

-고급스러운 맛을 내고 싶을 때 유자청을 조금 넣었다.

-양념(간장, 고추장, 소주, 유자청)이 바글바글 끓으면 불을 끄고 덕어 놓은 멸치를 부어 뒤적뒤적 양념이 잘 배게 섞는다.

-참기름은 맨 마지막에 넣어 한번 더 섞는데 취향에 따라 넣지 않아도 된다. 유자청과 향과 맛이 부딪친다. 

-유자청 대신 생강즙을 넣어도 된다. 단 한가지만 넣는다. 유자와 생강을 모두 넣으면 이맛도 자맛도 나지 않는다. 

-견과류를 넣고 싶다면 양념 만들 때 같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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