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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란서식 미니 이층 양옥 우리 집

순남씨 부엌에서 내가 컸다

 2014년 12월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즐거운 나의 집> 이라는 전시였다. 문성식 작가가 종이에 연필로 그린 「집」 이라는 그림을 처음 봤다. 작가가 그린 집이 바로 우리 집이였다. 나의 뇌 측두엽 해마의 시냅스 어딘가에 데이터로 깊숙이 저장되어 있던 우리 집이 그림으로 환생하여 내 앞에 나타난 듯 했다. 집 옆에 있는 닭장도 비슷했다. 우리 집에서는 토끼를 키웠었다.   (대문사진 출처는 문성식 작가 인스타그램에서)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다. 1980년생인 작가가 조부모 댁을 그린 것인데 화가의 어린 시절이나 나의 어린 시절에는 그림 속 ‘불란서식 미니 이층 양옥’이 새로운 ‘건축양식’으로 도시에도 농촌에도 많이 지어졌다. 지금은 구옥이 되어 이미 철거되었거나 리노베이션 대상이 되어버린 불란서식 집들은 여전히 가끔 내 눈 앞에 나타나곤 한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무턱대고 반갑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었으니까 할머니는 54세, 할아버지는 62세 때 새 집을 지으신 거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왜 할아버지가 새 집을 짓기로 마음을 먹으셨는지 헤아릴 길이 없다. 모아둔 재산이 많은 집도 아니었다. 돈이 들어올 일도 없던 형편이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새 집은 빚으로 지어진 집이었을 것이다. 새 집에 사는 내내 어른들은 돈 걱정을 많이 하셨다. 내가 집안 분위기를 읽을 수 있을 만큼 컸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옛 집에 살 때랑은 사뭇 달랐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말 쯤 우리 집이 필렸다. 우리 가족은 다시는 그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새 집의 터를 잡은 후 어느 날 할아버지가 어른들과 집 설계도를 놓고 무엇인가 상의를 하시다가 내 방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른바 설계변경 같은 것이었다. 내가 좋아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좋아했을 것이다.      

그림설명 : 기억 속 우리 새 집 1층 평면도


집 평면도에서 한 모퉁이를 뒤집힌 ‘ㄴ’자로 막으면 작은 공간이 나왔는데 그 곳이 내 방이 되었다. 내 방에는 남쪽과 동쪽으로 큼지막한 창문이 두 개나 있어서 채광이 매우 잘 되는 밝은 방이었다. 갑작스레 만들어지다 보니 내 방은 보일러 호스를 깔지 않았다. 옛날 구들장 방식으로 난방시스템을 들이게 되었다. 겨울이 되면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도 밖에서 연탄을 갈아야 했다. 할아버지는 가끔 연탄이 아닌 장작불을 떼 주시기도 했다. 큰 창문 두 개가 달린 작은 내 방은 다른 방들보다 추웠다. 결국 내 방은 여름 별장처럼 난방이 필요 없을 때만 사용하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내 방은 나만의 공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과학 잡지를 모아 두는 붙박이 선반도 한 개 천장 높이 달려있었다. 삼촌이 준 ‘스테레오 라디오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도 마음대로 틀 수 있었다. 나는 라디오를 듣기 보다는 카세트 테이프로 음악 듣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들었던 음악은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었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 부록처럼 딸려있던 곡이었다. 카세트 테이프 뒷면 끝에 있던 이 곡을 되감기로 해서 듣고 듣고 또 들었다.      


내 방은 친구들이 놀러 올 수 있는 아지트이기도 했다. 이불 속에 들어가 앉아 꼼지락 거리며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귤도 까먹었다. 어느 때는 잠시 세를 놓기도 했다. 우체국에서 전화교환원(전화교환수라고 불렀다 그 때는)로 일하는 언니가  살았다. 전화교환원은 1987년 이후로는 없어진 직업이다. 우리 집에 잠깐 살았던 그 언니는 마지막 교환수였던 셈이다.      


세를 놓았기 때문에 내 방이 없어져 버렸다. ‘불란서식 미니 이층 양옥’인 우리 집 이층에는 유휴공간이 많았다. 이층은 지붕이 그대로 천정이 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가운데는 높고 처마쪽은 매우 낮았다. 어른은 허리를 굽혀야 했지만 내 키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이층이라고 부르지 않고 다락이라고 불렀다. 안방에서 다락으로 연결되는 계단을 올라가면 부엌 위 다락방이 나왔다. 직사각형의 이 공간이 나의 새로운 공부방이 되었다. 앉은뱅이책상을 서향으로 난 작은 창 쪽에 놓고 이불 한 채를 놓았다. 다락방 생활은 겨울이 되면서 자연히 끝났다. 너무 추었다.      


새로 지은 집인데도 우리 집은 추웠다. 시멘트로 만든 계단이 현관을 대신했다. 큰 미닫이 유리문을 열면 바로 마루였다. 마루와 부엌바닥은 난방이 없었다. 창문도 방마다 많았고 크기도 컸다. 단열재를 제대로 넣었을까 싶기도 하다. 여름에는 시원했으니 겨울에 추운 건 당연한 것이었을까. 새 집임에도 겨울에는 안방에 난로가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다. 할머니가 음식을 하시던 장면에서 늘 허연 증기가 등장하는 이유도 새 집의 허술한 난방시스템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집과 비슷한 집만 봐도 반갑다. 불편했던 생활의 기억은 어디로 사라지고 10년을 채우지 못했던 그 집에서 보낸 일들이 기억으로 많이 남아있다. 큰할머니가 웅크린 체 제사 음식을 준비했던 넓은 마루, 친구들과 스케이트 놀이를 할 만큼 미끄러운 장판이 깔렸던 안방, 어린 사촌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계단, 수박 껍질을 손질했던 작은 욕실, 풍금이 있었던 서쪽 방, 이모 삼촌들의 책과 잡지가 쌓여있던 이층 골방.      


집이란게 정말 그런 것 같다. <즐거운 나의 집>  전시 포스터에 있던 영어 문장처럼 “Home where the heart is 내 마음이 있는 곳.” 불란서식 미니 양옥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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