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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책을 사오신 날

순남씨의 부엌에서 내가 컸다

해질녘 이었다. 대전에 다녀오신 할아버지의 오른손에 끈으로 잘 묶은 연탄 한 개만한 책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나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놀고 있었다. 힘을 일어가는 누런 햇빛이 할아버지의 등을 비추고 있었고 할아버지 손에서는 책 뭉치가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내 책이었다. 나를 위해 사오셨단다. 어린이날은 아니었다. 계림문고 소년소녀 세계명작 문고 1권부터 6권까지 총 여섯 권. 유일무이한 할아버지의 책 선물이었다. 새 집을 짓기 전이라 옛날 집 안방에서 괴도 루팡을 읽었다. 괴도 루팡을 읽은 덕분이었는지 셜록 홈즈가 인기가 많아 졌을 때도 셜록 홈즈는 읽지 않았다. 그래도 런던에 갔을 때 셜록 홈즈 박물관은 갔다.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 살았다고 했던 곳을 진짜 집으로 꾸며 놓은 박물관이라고 해서 찾아 갔다. 아주 좁은 계단과 좁은 방들이 3층까지 있었다.    

 

어린이인 나를 위한 전용 도서 구입은 한번 더 있었다. 먼 집안 삼촌뻘 되는 어르신이 선물해 주셨다고 했다. 계몽사의 15권짜리 소년소녀 한국전기전집이었다. 책이 여름에 생겼기 때문에 나는 여름방학 내내 위인전을 끼고 살았다. 을지문덕장군, 강감찬 장군을 읽었던 기억이 여전하다. 책은 두껍기도 해서 무거웠지만 오랫동안 내 책장에 있었다.     


새 집을 짓고 나서는 2층 다락방도 아닌데 창고도 아닌 만들다 만 공간에 이모 삼촌들의 책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널부러져 있었다. 서양명화집도 있었는데 우리 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다. 아마 막내 이모가 본 책이었을 것이다. 다락방에 많이 있던 책은 샘터라는 잡지였다. 누가 사 모았는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많았다. 공부하다가 지루하다 싶을 때 샘터를 읽었다. 그러다 손에 잡힌 책인 펄 벅의 대지라는 소설이었다. 어떤 중국 여인이 고생을 황소처럼 견디는 이야기였다. 마침 더운 여름에 읽어서 그랬는데 주인공의 고난이 더 팍팍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 읽어내었다. 대지는 중학생 때 쯤 읽었는데 최근 들어 다시 읽어보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잘 읽히지 않았다.  

    

한 때 책 욕심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0권과 타센 베이직 아트 시리즈를 전권 갖는 것이 꿈이었다. 꿈이 꿈이었다.  한풀이하듯 2009년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중 아트커버로 새로 디자인해서  판매한 10권 특별판을 샀다. 그 중 딱 한권만 포장을 뜯어 읽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역시 주인공은 아름다운 책 속에서도 고생 중이다. 


읽지도 않을 책들을 사서 모은다. 어떤 책은 2권을 산다 한권을 읽고 한권은 그대로 보관한다. 어떤 책은 선물하기 위해 중고로도 몇 권씩 사 둔다.  할아버지의 선물이 내 책에 대한 집착의 시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책 생각을 하면 그 날 할아버지가 책을 들고 계셨던 뒷모습이 생각난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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