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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 혜진 Jul 23. 2021

소확행, 작은 덫을 만들자

커피 마시러 출근하는 여자.

        

오래전 내가 아직 직장인으로 살던 어느 날의 일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후다닥 마치고 먹는 둥 마는 둥 빵 한 조각을 입에 넣고 허둥대며 집을 나섰다.  밤새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졌던지 전날에 느끼지 못했던 냉기가 후욱하고 나를 공격해 들어왔다.  추위를 떨쳐보려 가방을 고쳐 매며 바쁜 시늉을 했다. 마음을 추스르듯 옷매무새를 여몄다. 하지만 소매 깃이나 목덜미나 코트 아랫단으로 스미는 찬바람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한순간 다시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가고 싶어 졌다.


'일기예보를 좀 더 꼼꼼히 살펴 옷을 더 두껍게 입고 나왔어야 했는데, 다시 들어가 뭐라도 하나 더 걸치고 나올까. 아니  오늘은 그냥 출근하지 말까? 뭐든 결근할 핑곗거리가 없을까?'


고민하는 사이 발걸음이 느려졌다. 마치 뒤꿈치부터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까지 미세한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듯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정말 오늘만은 출근하기 싫다. 돌아서서 집으로 가자. 아직 이불속에 있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좀 더 잠을 청해볼까? 하루 종일 빈둥거리다 영화라도 한편 볼까? '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둑한 길에서 갈등하는 내 모습이  울컥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걸음은 여전히 지하철 역 쪽으로 향했다. 마치 그 시간엔 그 방향으로 가도록 세팅된 로봇처럼. 마음만 분주하게 갈등했다.


차라리 이럴 때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생겨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리고 나의 갈등도 없던 것처럼 중지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날, 나는 출근을 했을까? 그래. 출근했지. 출근하지 말자는 감성보다 출근해야 한다는 이성의 힘이 더 강했기 때문이겠지.  나를 기다리는 밀린 일과 직장 동료의 얼굴이 책임감이나 의무감 같은 단어와 함께 떠올랐다.


'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상사 얼굴에 사표를 집어던질게 아니라면 마음을 다잡고 출근을 해야지.  무엇보다 다음 달 카드값이나 생활비 걱정에 쉽게 퇴사를 할 수 없지.  이렇게 나약해서야 밥 먹고 살겠나. 언젠가 퇴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쫓겨나기보다 걷어차고 나가야지.' 나는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이직률 높은 중소기업에 관리자로 일을 하며 별의별 핑계를 대고 결근을 밥 먹듯 하는 사회 초년생들을 예상보다 자주 만났다. 나도 어쩌면 그날 돌부리에 걸려 살짝 삐끗하기라도 했다면, 아니 스쳐 지나는 사람이 나를 불쾌하게 노려보기만 했어도 사나운 일진 탓하며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너무너무 춥다는 것 외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가던 길을 걸어 지하철 역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날 나를 출근하도록 이끈 또 다른 유혹이 있었다.


뭐였냐고?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 때문이라면 믿을까? 그 무렵, 회사에 에스프레소 커피머신을 들였는데 제법 그 향과 맛이 좋았더랬다. 커피를 많이 마시지 않던 나도 제법 좋아했으니까. 나는 매일 아침 회사 문을 열고 들어가 곧장 탕비실로 향했다. 그리고 에스프레소를 내려 손에 들고 내 자리로 가곤 했다. 그 쌉싸름한 에스프레소 한잔이 하루 일과를 시작할 힘을 주었다.  빨리 그 커피를 마시고 싶어졌다. 행진하는 군인처럼 보폭이 커지고 속도가 붙었다.


어쩌면 나는 알았을 것이다. 조금만 더 걷다 보면 몸에 열이 올라 추위가 누그러질 테고 지하철을 타면 난방열 덕에 얼어붙은 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릴 것을. 곧 붐비는 지하철의  불편함도 참을만하게 될 것이고, 회사 근처에 다다르면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금방 내려진 쌉싸름한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고 직장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컴퓨터 전원을 켜면 출근하기 싫어서 다리에 힘이 풀리던 순간을 잊고 해야 할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날 사무실에 가야만 마실수 있는 에스프레소 한잔의 유혹이 나를 나태함에서 건졌다.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회사에 도착해서 커피머신의 단추를 누를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섰다. 다만 나는  속 쓰림 증세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를 하루에 한두 잔만 마실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간절하게 바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사람 간의 관계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을 때, 머릿속으로 커피의 쌉싸름한 풍미를 떠올리면 다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새날 아침이 기다려지기까지 했으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깟 평범한 커피가 내 출근의 동력이라는 말을 하면 자칫 비웃음을 살까 두렵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지 않으면 마술 같은 커피의 효능이 사라질 것 같았거든.    



 

날마다 아침이 되면 프로그래밍된 녹슨 로봇처럼 삐그덕거리며 매일 하던 것을 다시 하는 일상이 반복되지만, 어느 날 문득 몸에서 힘이 빠지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어 질 때가 오기 마련이다. 거창하거나 큰 이유와 목표로 너를 채찍질할 수도 있겠지만 남들을 따라 무심히 가던 길을 가거나 삶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굶주린 좀비처럼 허우적허우적 일터로 나가기도 하겠지. 출근해야 할 이유가 만 가지쯤 있더라도 출근하기 싫은 이유 하나 앞에서 무너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날의 나처럼 말이다.  그러니 네가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동력이 필요하다.

 

너를 즐겁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능하면 자주 생각해보길 바란다.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떠날 수 없는 여행,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만날 수 없는 친구나 연인, 보다만 드라마를 다시 볼 수 있는 시간. 누구나 기다리는 순간이 있지. 기분 좋은 생각이 떠오르게 하는 일들을 자주 만들고 자주 떠올리고 입꼬리를 올려보자. 삶이 즐거워야 일할 힘이 생기는 법이니까.


그런데 나는 좀 더 사소한 작은 덫을 '그곳'에 설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즐거움이나 권리보다 묵직한 의무가 더 많은 곳에 한두 가지쯤 너만의 즐거움이나 정 들일 것을 숨겨둬 보자. 가기 싫은 그 장소에 가야만 있는 것, 작은 화분이나 어항 속 물고기를 키워도 좋고 탕비실 깊숙이 나 혼자 몰래 꺼내먹는 달콤한 초콜릿을 숨겨둬도 괜찮지. 절대 대신 돌봐달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말고 다른 이들과 나눠 먹지도 말고 혼자 정성을 들이고 혼자 몰래 먹고 혼자 즐길 수 있는 것.    


 언젠가 내 친구가 제 시집식구 뒷담화를 하다 말고 시어머니가 매년 담가 두는 과일주 자랑을 하더라. 술이라면 독주만 마시는 친구의 시부모님은 담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마치 취미처럼 과일주를 담근다더라 그 덕에 내 친구는 시가에 갈 때마다  혼자 달달한 과일주를 즐긴다면서 가끔 과일주가 그리워 시가에 가고 싶어질 때도 있다더라. 나는 내 친구의 말을 듣고 "어이구, 큰 덫에 걸렸구나" 하며 환하게 웃어줬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결국 나는 그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여러 가지 상황이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들었지만 더 이상 그 커피를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은 정말 아쉬웠단다. 그런데, 같은 브랜드의 커피를 다른 곳에서 만났을 때  내가 알게 된 것은, 그 커피의 풍미가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는 것과 특별히 내 취향도 아니더라는 거였다. 그래도 나는 헤어진 연인처럼 그 커피를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나를 이끌어 가야 할 곳에 데려다 놓는 작고 보잘것없지만 제법 힘이 강한, 내가 만든  덫. 내가 출퇴근을 반복하며 삶을 이어갈 때, 그 커피는 나를 위로하고 반겨주며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주어 쉽게 포기하지 못하도록 독려하는 작은 유혹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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