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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진 Aug 24. 2019

가을의 무화과

아침의 피아노를 읽고 나서,

따뜻했던 봄 그리니치 파크에 털썩 앉아 아침의 피아노를 읽었던 날.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다. 

인간은 무르익어 죽는다. 

온 세상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아침의 피아노 본문 중.


끼니를 신경 쓴다는 것. 식사와 함께 마실 음료를 고민한다는 것
아침이면 아침 나름대로 밤이 찾아오면 또 그 나름대로 모든 기분이 달콤해지는 그런 뷰를 가지고 있던 숙소.


5월의 런던.

매일같이 나른하고 소소한 행복을 늘어지게 보내던 시기였다.

평소와 같이 느지막이 일어나, 며칠 전 버로우 마켓에서 사 온 커다란 빵과 이탈리안 발사믹을 꺼내고 뭔가 아쉽다며 전날 마시다 남겨둔 채 대강 입구를 막아두었던 레드와인도 한잔 따라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자- 완성. 아 이런 게 작은 행복이지라며 입가에 웃음을 짓고,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책을 고심했다. 

통유리창으로 감싸져 있는 거실 한 편. 방을 보자마자 널따란 뷰에 반했던 집. 저녁이 되면 창문 앞에 둔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함께 했고 기분 좋은 야경에 와인과 맥주로 밤을 지새웠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창가 턱에 다리를 올려둔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침의 피아노. 철학자 김진영 선생이 암을 선고받은 이후부터 임종 3일 전까지 적었던 문장들을 모아둔 책. 이 책은 모든 구간이 무거워 원체 읽을 때마다 한 장을 쉽게 넘기지 못하는 책이지만 이 날 읽었던 이 부근은 특히나 내게 더 그랬다. 


버로우 마켓에서 구매한 커-다란 빵. 이런 게 바로 장발장이 훔쳤던 사이즈의 빵이려나?
5월의 영국은, 매 끼니를 신경쓰고 함께 할 술도 고심해서 골랐던 바쁜 일상에 퇴색되던 내 미각을 찾아준 한달이었다.


사실 삶이란 게 언제나 그렇듯이, 일을 시작하고 나름대로 책임감이라는 무게를 달고 살다 보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게 무엇이었는지 잊게 될 때가 많다. 책도 자연도 식사도.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행동마저 귀찮은 일이 되어버리며, 어느새 티브이 앞에 멍하니 앉아 하루를 보내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오늘의 구름은 어떤지, 햇빛은 따사로운지. 하늘은 얼마나 높이 떠 있는지.

나무에 달린 잎들은 갓 태어난 여린 초록잎인지, 곧 바닥에 내려앉아 쉬어갈 붉은 갈색인지. 그렇게 천천히 세상을 바라보고 그 시간 속에 살아가야 한다. 가득 찬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바쁘다고 지나쳐버린다면 나중에 나의 시간을 돌아볼 때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

가을의 무화과처럼 한참 무르익어 물컹해졌건만 그 과육은 단맛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작은 순간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계절 안에 시간 안에 세상 안에 가득 담겨 작은 즐거움을 만들다 보면 그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아주 커다랗게 나를 채울 것이다.

아주 단단하고 달큰한 과육이 가득 찬 무화과가 되어 있을 거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모두 단단하고 달큰한 가을의 무화과가 되기 위하여,

하루하루 온전히 시간을 살아가며 인생의 작은 기쁨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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