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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Oct 20. 2023

어른의 요건

만두소를 만든다는 것



어른을 정의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는 연령으로, 또 다른 누구는 연륜으로 척도를 잡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기준이 몇 가지 있는데 다분히 개인적이어서 말하기가 민망하다.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시절, 내가 정한 어른의 요소를 나열해 보자면 이렇다. 하나, 트렌치코트가 잘 어울릴 것. 둘, 자신만의 베스트 향수가 있을 것. 셋, 까지 있었으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억지로 잊어버렸을 것이다. 트렌치코트를 여러 벌 사 입고 향수를 적당히 뿌릴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를 어른이라 규정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깨지지 않는 요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만두소'를 만들 줄 아느냐는 것이다.


만두소는 매우 까다로운 영역이다. 일단 간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최대 난제다. 물론 우리 할머니는 가끔 간을 보시는 듯 하지만 잘게 다진 생 돼지고기가 들어간다면 건강과 직결될 수 있기에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여차하면 도와줄 든든한 조수, 간장이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소스일 뿐이다. 오직 눈으로만 맛볼 수 있는 아이러니한 음식. 또 적당한 양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갖은 재료를 넣고 넣다 보면 순식간에 불어나 그릇을 바꿔본 경험, 없으신가요? 그렇다고 찔끔찔끔 재료를 넣자니 만두별로 속재료가 천차만별이 될 위험이 있다. 과감함과 절제미가 응축된 것이 바로 소 만들기다. 물론 만두피가 모자라면 데굴데굴 소만 굴려 굴림만두를 해 먹을 수도 있고, 소가 모자라면 만두피를 아무렇게나 잘라 수제비처럼 먹을 수도 있지만 알맞게 딱 떨어질 때의 만족감은 또 다르다. 그리하여 만두소를 보면 주방에서의 연식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이 학계, 아니 나만의 정설이다.


물론 나도 만두는 기가 막히게 잘 빚지만 만두소는 만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수의 영역이랄까. 아니 가만있어보자. 생각해 보니 무려 4탄까지 나온 <쿵푸팬더>에서 주인공 '포'가 사부와의 수련에서 처음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만두 뺏어먹기 아니었나. 역시, 만두는 고수의 영역임에 틀림없다. 만두가 터지지 않게 양껏 넣어 쫀쫀하게 빚는 것도 물론 중요한 부분이지만 결과적으로 얇은 베일을 터뜨리고 나와 본연의 맛을 내는 역할은 소가 다 하는 것이니 외유내강의 정석이며 셰프의 내공을 전부 담아낸 최종병기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더 머뭇거리게 했다.


우리 집에서도 지금껏 만두소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었다. 신김치를 꺼내 송송 썰고 거기에 다진 고기와 두부, 숙주 따위를 양껏 넣어 단단한 소를 만들어 내면 큰어머니, 엄마, 고모는 일사천리로 만두를 빚어냈다. 나 역시 엄마에게 배운 대로 나름 고사리 손으로 모양도 내가며 거들었다. 네모난 쟁반이 모자라 커다란 상을 펴놓고 만두를 줄 세워 올리던 장면이 어제 같다. 멸치 육수를 넣은 맑은 다시다 국물에 만두 서너 알. 작은 앞 접시에 덜어 세 등분으로 갈라 숟가락으로 간장을 살짝 찍어 올려 한 입에 넣는다. 이건 할아버지가 알려준 방법. 할머니의 만두로 온 가족의 가르침 아래 자란 나였다.


할머니 만두의 시절은 지나고 엄마 만두 세대가 도래했다. 명절이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엄마와 나는 신문지를 펴고 앉아 만두를 빚는다. 사실 몇 주 전부터 엄마는 만두소에 뭘 넣을지 고민하며 지낸다. 신 김치가 별로 없어서 식초에 담근 양배추를 넣으려고 해, 넌 매운 걸 좋아하니 청양고추에 고춧가루도 더 넣을까 봐, 냉동실에 오래된 떡갈비가 있는데 그거 만두에 넣어도 돼? 수프에 밥 말아먹는 걸 좋아하는 엄마답게 특별한 레시피는 따로 없고 그때그때마다 있는 재료로 만들어지는 만두소. 꽤나 고지식한 나는 만들기 전 한껏 의심스럽지만 이상하리만치 늘 맛있다. 아주 맛있어서 내년 명절을 또 기다리고 앉았다. 그런 엄마도 만두소를 직접 만들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다. 그런 걸 보면 만두소는 정말 어른의 영역임이 분명하다.


만두소를 만들 줄 아는 어른은 존경스럽다. 쉽사리 가늠할 수 없는 온갖 것들이 폭풍처럼 몰아쳐도 기꺼이 인생이라는 한 대접에 담아 맛깔스럽게 비벼낼 줄 아는 사람들. 그렇게 이겨낸 시련을 아무렇지 않게 뭉쳐 경험 한 개로 빚어낼 줄 아는 사람들. 그런 어른이 나도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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