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무원이 된 이유
포기하고 싶어 질 때 왜 시작했는지를 기억하라
수험생 시절 지친 나를 일으켜 세웠던 한 마디. 3년 전, 나는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처음에 공무원이 되겠다고 결심한 건 2015년 여름이었다. 20대의 나는 수험 공부를 하다가 온 몸이 다 망가진 채 돌아온, 새로운 꿈을 꾸던 복학생이었다. 경영학을 전공한 난 대학 동기들이, 선배들이 그러했듯 커리어우먼을 꿈꿨고, 각 방송국의 편성표를 외울 만큼 드라마와 예능을 사랑했다. 이런 내가 방송국에 취직하겠다 결심한 건 아주 자연스러운 전개였다.
열심히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시간을 쪼개 학점관리에 도움이 안 되는 언론정보학 수업을 부전공으로 듣고, 유명 콘텐츠 기업에서 짧지만 인턴십도 했다. 시사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매일 밤 방송 트렌드를 분석하고 블로그에 포스팅했다. 논술 시험을 대비하겠다며 초록색 1,000자 원고지도 샀다.
다행히 그 노력들은 헛되지 않았다. 국내 최고 방송국 인턴 서류전형에 합격하게 해 줬으니까. 내가 원하는 경영지원분야는 규모가 있는 방송국들 중 딱 한 군데만 인턴을 모집하는데 그 1차 전형을 통과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낸 마음속 1등 방송국에서 일할지도 모른다니! 잠도 설칠 만큼 행복했다.
면접을 보러 간 날, 상암의 그 건물을 올려다보며 괜히 마음이 벅찼다. 자연스럽게 꼭 이 곳의 출입증을 갖겠다는 결심과 목표가 생겼다.
그 꿈은 곧 산산조각 났다. 20분 남짓한 면접시간 동안 나는 철저히 부품 취급을 당했다. 그곳에서 나는 1년간 열심히 쓰일 '소모품'에 불과했고, 그건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일인 듯했다. 지금은 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이곳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회사들이 그렇다는 걸 알지만, 그때의 나는 순진했고, 놀랐으며, 조금 슬펐다(사실 여기만큼은 안 그럴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 누워서 한참을 생각했다. 그곳의 사람들과 나에 대해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 선배 인턴의 퀭한 눈과 영혼까지 갈아 넣는다는 말. 너무 바쁜 사람들.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싶은 건가? 나는 뭘 하고 싶은 거지? 어떻게 살고 싶은 거야?
그 고민은 한 달이 넘게 이어졌다. 눈을 감고 40대, 50대, 60대의 나를 그리고 또 그렸다.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을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그 나이의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지 장면 장면들을 그렸다. 내가 그려낸 나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고, 글을 쓰는 사람이었고, 내가 가진 생각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었다. 주변을 돌아볼 줄 알고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 언젠가 내 이름을 걸고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글쓴이'가 되고 싶었다. 물론 갈길은 멀어 보였지만, 상상 속의 나는 행복했다. 그래, 답을 찾은 것이다.
1.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는
2. 주말출근이 되도록 없는
3. 가족들에게 떳떳한
4. 아이를 키워도 괜찮은
5. 보람 있는
상상 속 나의 모습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직업의 조건을 써 내려갔다. 대한민국에서 이 모든 걸 갖춘 건 공무원밖에 없어 보였다. 퇴근하고 나면 내 시간이 있고, 공휴일엔 쉬는 공무원.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아도 대한민국에서 육아휴직이 가장 잘 보장되는 직업. 게다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어느 정도 보람도 있을 테지. 단지 그 이유로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 애석하게도 애국심, 봉사정신 뭐 이런 건 동기가 아니었다.
초록창에 '공무원 직렬'을 검색해봤다.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의 공무원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 내가 갈 수 없는 기술직은 빼고 행정직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중앙부처의 7급 공무원. 일 년에 몇 명 뽑지 않은 직렬이었지만, 전공과 가장 유사한 과목들을 시험으로 보는 직렬이었고 보람을 느낄만한 직렬이라고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내가 공무원이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공무원이 되면 좋겠다 했다. 따박따박 월급 나오고 잘릴 걱정 없이 사는 게 제일 좋은 거라며.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공무원은 '재미없는 일'이었으니까. 고3 때 엄마의 소원이었던 교대 진학도 마찬가지였다. 내 그릇은 간장종지라 선생님은 절대 못 된다고 선 그었다. 그랬던 내가 갑자기 공무원이 되겠다고 했을 때 모든 가족이 놀랐다. 네가 공무원이 된다고? 동생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고, 엄마는 이제라도 잘 생각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 년 반을 공부했다. 그리고 여름, 다른 시험에 덜컥 붙어버렸다. 내가 가고자 했던 직렬은 일 년에 시험이 단 한 번뿐이라 시험 삼아 다른 직렬도 함께 응시했다. 합격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그저 모의고사 같은 것이었는데, 합격이라고?
임용을 포기하려 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직렬이고, 아직 끝까지 도전해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은 불안했다. 내 마음 속에 정해놓은 기간이 있었다. 적어도 이 나이때까지는 합격하겠다고, 만약 합격하지 못하면 중소기업에 들어가든 무슨 직업이라도 갖겠다고 결심했는데 내년이면 그 나이가 되었다. 내년에 합격할 수 있을까? 그 불안 속으로 주변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날아 들어왔다.
ㅡ 안 해봐서 그런 거지, 해보면 괜찮을지도 몰라.
ㅡ 해보고 정 안 맞으면 그때 그만둬도 되는 거 아니니?
ㅡ 그것도 못 가서 난리인 세상이야!
ㅡ 너 나이가 몇 살이더라?
마음속 불안은 사람들의 말들을 먹으며 몸집을 키웠다. 무엇보다도 넉넉지 못한 형편에 혼자 벌며 나를 뒷바라지하고 있는 엄마가 안쓰러웠고, 그곳에서도 내가 잘하면 될 거라는 약간의 희망도 피어났다. 정말 안 맞으면 그만두고 다시 공부하면 되는 거니까ㅡ하는 안일한 위로를 마음에 품고 나는 국가직 9급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공무원을 그만두려 한다.
+)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맞지 않는 꿈을 꾸고 있던 나를 알게 해 준 상암의 그곳에 감사하다. 덕분에 나의 '진짜 꿈'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