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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Oct 31. 2019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세 공무원이다

첫 출근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배워가며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규직원이 왔다. 말쑥한 정장을 입고 인사 차장님을 따라 과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각오 한 마디하라는 과장님의 말씀에 조금 떨리지만 당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가 참 예뻐 보였다.


나도 신규였다. 아니지, 아직 순환보직이 안 끝났으니 여전히 신규다(우리 조직의 신규직원들은 각 과에서 의무적으로 1년씩 근무하도록 되어있다).


처음 수습으로 발령받았을 때, 나도 그녀만큼 떨렸고, 당찼다. 국세청 직원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인재가 되고 싶었고, 공익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물론 오고 싶어서 온 곳은 아니었지만, 내가 여기에 온 것도 다 뜻이 있을 테니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프로 공무원이 되어야지 생각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첫 출근날 나를 가장 당황하게 한 건 온도차였다. 나의 합격을 대하는 안과 밖의 온도차.


합격자 발표 당일. 6시부터 문자가 간다는데 6시가 지나도 연락이 안 와 조마조마하는 마음에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다.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기다리는 입장이 되어보니 얼마나 초조하던지. 그리고 명단에 내 수험번호가 있었을 때 안도감이 훅 밀려왔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안도와 얼떨떨함이 동시에 찾아왔던 나와는 달리 가족들, 친구들,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 친구, 하다못해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단번에 축하해주었다. 심지어 나보다도 훨씬 더 행복해해서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결국 도착한 합격 문자. 좀 더 일찍 왔으면 덜 초조했을 텐데!




공부하느라 수고했다, 좋은 공무원이 되거라. 뭐 그런 말도 들었던 것 같다. 가끔 부러움 섞인 말들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질투가 아닌 축하의 마음이었고 그들의 기뻐하는 표정에서 나도 '합격'을 실감했다. 조금 기뻤다. 나랏밥 먹는 딸을 뒀다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엄마를 보며 당신의 자랑이 된 것 같아 효도하는 기분도 들었고.


나랏밥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법 공부도, 회계 공부도 열심히 했다. 어쩌다 국세청 관련 뉴스를 보면 열심히 읽었고 저기가 내 직장이다 생각하면 뿌듯했다. 가끔 공무원 월급을 한탄하는 글들도 읽었지만 괜찮았다. 돈이 중요했다면 애초에 공시생이 되지도 않았을 거였으니까. 그저 내가 얻을 보람과 자부심으로 충분히 메꾸면 될 일이었다.


첫 출근. 떨렸고, 조금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두근댔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열심히 배워야지ㅡ를 몇 번이고 되뇌며 인사팀 소파에 앉아서 내가 일할 곳을 열심히 그렸다.


과에 가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신규직원이라고 다들 반갑게 맞아주셨다. 한 번씩 오셔서 이름은 뭐냐, 나이는 몇 살이냐, 학교는 어디 나왔냐, 공부는 얼마나 했냐, 세법 회계는 좀 배웠냐 등등의 질문을 하고 가셨다. 사람에 따라서는 불편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그냥 신규에 대한 '관심' 수준의 질문으로 들렸기에 나도 열심히 답했다.


직원분들에 따라 나에게 궁금한 건 각양각색이었는데, 모든 분들의 끝맺음은 같았다.



여기 오려고 온 건 아니지?
얼른 공부해서 다른 데로 가.



그 순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눈치껏 멍청한 웃음을 지었다. 내 표정을 내가 볼 수 없었지만 아마 좀 이상한 표정이었을 거다. 입은 웃는데 눈동자는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이게 무슨 뜻이지?를 고민하는.


제주도에 있는 교육원에서 우리는 아침 밤마다 외쳤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세 공무원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국세청 직원이다. 첫 출근날, 선배들은 격렬하게 부정해주었다. 아닌데? 자부심이 뭐야? 어쩌면 그래서 우리에게 그렇게 외치게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코딱지만큼의 자부심이라도 억지로 심어주려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규였지만 '얼른 나가'라는 말이 첫 출근한 직원에게 해줄 만한 말은 아니라는 건 알았다. 당황했지만 이해하려 했다. 나를 겁주려는 거라고. 웬만한 각오 없이는 안 된다고 그러니 마음 든든하게 먹으라고 하는 거라고.


그때 알았어야 했다. 절대 겁을 주려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순도 100%의 진심이 담긴 말이라는 걸.


신규직원에게 해주는 말이 어서 나가라는 조직에 내가 마음을 붙일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진리처럼.  


지금이라도 선배님들의 충고를 귀담아들으려 한다. 이 조직 밖으로 나가는 것. 그 충고를 들은 날로부터 2년이 다 되어가는 걸 생각하며 늦었다고 좌절하다가, 앞으로 이 조직에서 보내게 될 30년을 생각하며 늦지 않았다ㅡ다짐한다.


그래서 오늘도 움직였다. 한 뼘 정도, 바깥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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